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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6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3부 남로당의 궤멸/폭격속에 전승박람회 준비/허헌 청천강 건너다 폭우로 배 뒤집혀 사망
하루는 인민군 정찰국에 있는 최상린이 찾아와 지금 맥아더가 이 전쟁을 구실삼아 일본군을 재건한다는 정보가 있어 이를 조사키 위해 일본으로 파견할 적당한 사람을 구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좋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국제성원관 건설때문에 그에게 사람을 소개할 여유가 없었다. 국제성원관 건설에는 외무성ㆍ민청ㆍ여맹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 일을 협조하고 있었다. 매일 폭격이 심해 중국 안동에서 자재를 실어오는 화물자동차가 폭격당해 물품이 도착되지도 않고 또 평양밖 40∼50리까지 와서 자동차가 고장나 못오면 소달구지로 실어 오기도 했다.
내 숙소도 몇번 폭격당했고 일이 바빠 숙소에 가서 자지도 못했다. 하루는 문화선전성 지하방공호 허정숙의 방 테이블 위에서 자고 나니 내 숙소가 그날밤 직격탄을 맞아 자던 사람이 몰살당한 일도 있었다.
휴전이 8ㆍ15까지 될지도 모르고 이렇게 폭격이 심한 가운데 전승박람회를 개최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다.
8월15일은 닥쳐오는데 예정대로 준비가 되지 않으니 독촉하러 허정숙이 중앙당비서 박정애,부위원장 허가이,박헌영이 잇따라 오는 등 김일성을 제외하고는 최고 높은 사람들은 다 왔었다. 김일성은 폭격이 무서워 평양시내에서 50리쯤 떨어진 대성산밑 방공호만의 최고사령부에 숨어 앉아 명령만 하고 평양시내에는 절대로 나오지 않았다.
김일성만큼 자기생명에 대해 겁이 많은 사람은 없었다. 지금도 그는 비행기는 겁이 나 절대 타려하지 않는다.
허가이는 풍골이 좋았다.
8월13일이 되어도 휴전협정이 체결될 가망성은 보이지 않았다. 철원 북방 「철의 삼각지」 공방전은 점점 더 심해지고 평양에 대한 폭격은 절정에 달했다.
그때 평양일대에는 큰 비가 와 수해가 극심했다. 대동강과 청천강은 범람해 수십년래 처음의 대수해였었다. 그래도 나는 전력을 다해 8월15일에는 국제성원관을 개관할 수 있도록 김일성의 명령을 수행했다.
8월14일이었다. 최종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었다. 갑자기 쿵 하며 땅이 울리더니 전기불이 꺼져 관내가 캄캄해졌다.
나는 밖으로 나가려고 뒤로 돌아서려 했으나 칸막이 길을 많이 돌아야 하겠기에 못이 박혀 있는 비상문(도적이 심해 비상문에는 다 못을 박아 놓았었다)을 힘껏 걷어찼다. 비상문짝이 떨어지며 나의 몸은 문밖으로 몇m 나가 떨어졌다. 그때 등뒤에서 쿵 하며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래도 정신을 차려 일어났다. 하늘에는 비행기가 갈가마귀떼 같이 날고 있었다.
아동궁전은 붉은 벽돌벽만 남고 지붕과 창문이 다 없어져 있었다. 아동궁전 한가운데 폭탄이 명중해 전시품은 전부 박살이 나 있었다. 물건보다도 사람 죽은 것이 큰일이었다. 외무성과 여맹에서 나온 사람들이 그안에 있다가 피하지 못해 죽었다. 시체를 파내보니 입고 있던 블라우스와 치마는 다 날아가고 코에서 두줄기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일을 어떻게 하나. 책임자인 내가 죽어야하는데 협조하러 나온 사람들이 죽었으니 이제 나는 죽는다 싶었다.
김일성이 마땅히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항상 책임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언제든지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것이 김일성의 버릇이었다.
이날 폭격으로 평양에서 수백명이 죽었으며 소련출신으로 유명한 「백두산」이라는 장시를 쓴 시인 조기천도 이날 폭격에 사망했다.
그리고 이날 죽은 사람중에 또 한명의 유명한 인물이 있다. 허헌이다. 허헌은 최고인민회의 의장직과 김일성대학 총장직을 겸하고 있었다. 김일성대학은 그때 평안북도 비현이라는 농촌에 소재돼 있었다.
8ㆍ15기념식에 출석하기 위해 허헌이 폭우를 맞으며 청천강을 건너다가 배가 뒤집혀 그만 물에 빠져죽고 말았다. 그의 시체도 찾지 못하고 말았다.
나는 회의에서 책임을 추궁당하기 시작했다. 책임이 있다면 김일성과 미 공군에 있지 나도 겨우 살아남았는데 내가 무슨 책임을 져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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