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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시진핑은 왜 후진타오를 퇴장시켰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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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시진핑(習近平ㆍ이하 호칭 생략) 중국 국가주석이 집권 후 첫 해외 방문국인 러시아에 도착한 것은 2013년 3월 22일이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으로선 국가주석으로 선출된 지 8일 만에 자신을 찾아온 시진핑이 반갑고 고마웠을 것이다.

시진핑 국가주석을 필두로 한 중국 신임 최고지도부 7명이 23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의 기자회견장에 입장하고 있다. 시 주석 뒤로 리창(총리 예상), 자오러지(전인대 상무위원장 예상 등이 따라 들어오고 있다. AFP=연합뉴스

시진핑 국가주석을 필두로 한 중국 신임 최고지도부 7명이 23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의 기자회견장에 입장하고 있다. 시 주석 뒤로 리창(총리 예상), 자오러지(전인대 상무위원장 예상 등이 따라 들어오고 있다. AFP=연합뉴스

 평소의 딱딱한 표정을 풀고 ‘따바뤼쉬(동지)!’라 부른 푸틴에게 시진핑은 이렇게 화답했다. “우리는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흐른 지난 뒤 시진핑과 푸틴의 비슷한 점 가운데 하나가 공식 확인됐다. 정해진 임기가 다한 뒤에도 물러나지 않고 권좌를 지킬 것이란 결심이 이미 그때 시진핑의 머릿속에 있었는지 모른다.

정치인맥 지도로 본 시진핑 신시대 # #시진핑 등 혁명 1세대 직계들 "중국 홍색강산은 누가 만들었나" 공유 #후진타오·리커창 등 공청단 엘리트는 공산체제의 피고용인으로 여겨 #후진타오 때부터 결집, 반부패 앞세워 상하이방·공청단 차례로 제게 #시진핑 1인 시대 완성… 핵심 측근 세력인 시자쥔이 옹위하는 시스템 #

21세기판 중국 황제의 대관식
 지난 22일 폐막한 중국 공산당 20차 당대회는 시진핑이 21세기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는 대관식이었다. 그는 덩샤오핑이 세워놓고 떠난 ‘5년 임기, 2차례 연임’ 불문율을 깨뜨림으로써 3연임은 물론 종신집권의 길을 열었다. 또 ‘인민영수’ 지위를 부여받고 ‘시진핑 사상’을 14억 인구의 중국을 이끄는 지도 이념으로 명문화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 정해놓은 사실을 수년간의 준비를 거쳐 공식화한 것에 불과했다. 1시간 40여분 동안 행한 개막식 공식 연설에서도 딱히 새로운 이념이나 노선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는 3시간 반 연설을 통해 마오쩌둥-덩샤오핑 시대를 잇는 시진핑 ‘신시대’의 개막을 선포하며 2050년 종합국력 세계선두 국가를 목표로 내세운 5년 전 19차 당대회 연설보다 파급력(임팩트)이 훨씬 약했다.
 대신 과거에 보지 못했던 초유의 장면이 이번 당대회에서 연출됐으니 바로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의 중도 퇴장이었다. 여러 차례 동영상을 되돌려보면 후진타오가 스스로 퇴장한 것이 아니라 시진핑의 지시를 받은 요원에 의해 ‘퇴장당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후진타오가 곧 시작될 당장 개정 표결에서 반대표를 행사할 것을 우려해 퇴장시킨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지만, 이는 공산당의 기율과 관행에 비춰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폐문(閉門) 회의라 불리는 비공개 토론 석상에서야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공개회의 석상에서 그것도 거수로 행하는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지는 반당(反黨) 행위는 멸문지화를 자초하는 일이다.

22일 중국공산당 대회 폐막식 도중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가운데)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다. 시진핑 주석 지시로 퇴장당한 것이란 분석이 유력하다. AP=연합뉴스

22일 중국공산당 대회 폐막식 도중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가운데)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다. 시진핑 주석 지시로 퇴장당한 것이란 분석이 유력하다. AP=연합뉴스

 내막이 무엇이든 후진타오가 퇴장을 당한 장면만큼 ‘시진핑 신시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없다. 때마침 그가 퇴장하던 길목에 퇴임이 확정된 리커창 총리가 앉아 있었기에 후진타오는 리커창의 어깨를 한 번 툭 칠 수 있었다.
 리커창은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후진타오가 길러낸 직계 후배다. 리커창과 함께 퇴임이 확정된 왕양 정협주석도 마찬가지로 공청단이 배출한 엘리트였다. 두 사람의 퇴임은 어찌 보면 임기를 다해 물러나는 기존 관행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정치국원 자리를 내놓고 중앙위원으로 강등당한 후춘화의 경우는 공청단 파벌, 즉 퇀파이에겐 훨씬 더 가혹하고 치명적인 조치였다. 후춘화는 40대에 정치국원에 진입했고 최근까지도 7인 상무위원 가운데 한 자리는 차지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 있었는데 이번에 사실상 정치 생명이 다한 것이다. 원래 정치국원은 25명이 정수였는데 이번에는 24명으로 확정됐다. 찬반 표결을 생각할 때 짝수 정원은 이례적이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 후춘화가 배제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무성하다.

시진핑의 성공 발판은 태자당(홍이대)
 그렇다면 공청단은 왜 시진핑 신시대를 함께 축하하지 못하고 수난을 당하는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진핑의 정치 배경이라 할 수 있는 ‘태자당’ 혹은 ‘홍이대(紅二代)’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이는 중국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혁명 원로(1세대)의 직계 자녀를 일컫는 말이다.
 시진핑은 샨베이(陝北) 지방에서 활동했고 마오쩌둥이 대장정을 거쳐 이곳을 혁명근거지로 삼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시중쉰의 아들이다. 이런 출신 배경으로 인해 홍이대의 동향은 장쩌민 전 주석을 구심점으로 한 파벌을 일컫는 상하이방이나 공청단 출신 인맥인 퇸파이에 비해 훨씬 더 베일에 싸여 있다. 그 내막을 아는 위치에 있는 인사 A씨로부터 직접 들은 설명은 이렇다.
 “그들이 곧잘 하는 말 가운데 ‘홍색강산(紅色江山ㆍ중국 공산주의 체제를 의미)은 누가 일군 것인가’란 말이 있다. 어릴 때부터 중국 지도자의 자녀로 자라면서 기른 명예심과 애국심 등이 좋은 쪽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반대로 방향이 잘못되면 배타적인 특권의식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홍이대는 기업으로 따지면 창업주의 직계다. 그들이 보기에 공청단 등 간부들은 자신의 부모들이 일군 기업의 피고용인인 셈이다.  ”
 홍이대는 개개인의 자부심이 강하다 보니 서로 밀고 당겨주는 공청단이나 상하이방에 비해 조직적 결속이 약하고, 그래서 정치 파벌로 보기에 모호한 측면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후진타오 집권 시절에 태자당이 결집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한다. A씨의 설명은 이렇게 이어진다.
 “홍이대 인사들은 춘절(음력 설)에 모여 단배식을 같이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공청단에 대한 불만과 함께 다음 지도자는 홍이대가 배출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세 사람 정도의 중심인물이 있었다. 보시라이와 류위안, 그리고 시진핑이었다. 보시라이는 특히 태자당 내 큰 누님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는데, 알다시피 부인의 범죄사건과 부하가 미국 총영사관에 망명을 시도하는 등의 변고로 실각하고 말았다. 류위안은 류샤오치 주석의 아들로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부친이 숙청당해 사망에 이른 내력이 있어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고, 그는 군과 무장경찰 방면으로 갔다. 시진핑은 지방 간부와 군 관련 직책 등 당ㆍ정ㆍ군을 두루 거치며 경력을 쌓았다는 점 때문에 자연스레 태자당의 리더가 됐다.”
 시진핑이 공산당 1인자로 최종 낙점을 받는 데에는 운이 따른 측면도 있었다는 게 A씨의 분석이다. 후진타오 집권기는 공청단과 상하이방 출신 인맥이 물밑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치던 시절이었다. 상하이방 실력자로 각광받던 천량위 상하이 총서기 실각 사건은 그 권력 암투를 상징하는 사례였다.

중국 전통의 집단지배체제 무너져
 두 파벌은 후진타오의 후임자를 놓고도 밀고 밀리는 싸움을 펼쳤는데, 그 과정에서 홍이대인 시진핑이 어부지리를 얻게 된 것이다. 시진핑을 서열 1위의 총서기 겸 국가주석으로 하고 리커창을 서열 2위인 총리로 출범한 것은 당시 장쩌민과 후진타오, 그리고 쩡칭훙 등의 이해관계가 얽혀 타협한 산물이었다는 설명이다.
 시진핑 정권 출범 초만 해도 후진타오 시절의 집단지도체제가 잘 지켜지리란 예상이 우세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산당 중앙에서 시진핑 개인의 권력기반이 약했다는 점도 그런 예상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시진핑은 강력한 반부패 드라이브를 무기로 삼아 상하이방과 공청단를 차례로 제거해 나갔다. 친(親)장쩌민 계열의 저우융캉 전 정법위 서기를 숙청함으로써 “한번 상무위원은 영원히 형사처벌을 면한다”는 불문율을 깨뜨림으로써 성역이 없음을 과시한 그는 후진타오의 심복이었던 링지화를 제물로 삼아 공청단 세력까지 제거해 나갔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이 오늘날 시진핑의 핵심 측근이 된 시자쥔(習家軍)이다. 우리말로 하면 시진핑 사단쯤 되는 용어다. 시진핑은 젊은 시절부터 지방 근무를 자청해 허베이-푸젠-저장-상하이를 두루 거쳤는데, 이때 가는 곳마다 맺은 부하들을 총서기 취임 후 한 명씩 불러들여 중앙 요직에 앉힌 것이다. 5년 전 이들은 권력 정점인 상무위원에 이를 정도의 경력과 연령에 못 미쳐 정치국원에 주로 포진됐다가 이번에 대거 상무위원으로 승진했다. 가령, 총리 기용이 확실시되는 권력 서열 2위의 리창 현 상하이 서기는 그가 저장성 근무 시절에 2년여 동안 비서장을 맡았던 측근이다.
 마오쩌둥-덩샤오핑의 시대를 잇는 시진핑 신시대는 여러 측면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지만, 정치 시스템으로 볼 때는 집단지도체제의 전통이 형해화(形骸化)하고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치인맥 또는 파벌의 관점에선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개혁개방 이후의 한 시대를 지배하던 상하이방과 공청단 파벌이 소멸 내지 퇴장하고 시자쥔 독점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면 시진핑을 배출한 태자당 또는 홍이대는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혁명 1세의 직계 그룹은 이미 연령적 한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홍삼대가 부상할 시점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시진핑의 시대의 중난하이 권력은 마지막 태자당인 시진핑을 정점으로 하고, 이를 시자쥔이 떠받치는 체제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