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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병상의 코멘터리

인도귀족이 총리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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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영국의 신임총리 리시 수낵이 25일 총리관저 다우닝 10번지 앞에서 취재진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영국의 신임총리 리시 수낵이 25일 총리관저 다우닝 10번지 앞에서 취재진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1. 리시 수낵(42)이 유색인종 최초로 25일 영국 총리에 취임했습니다.
수낵은 금수저입니다. 인도의 최고계급 브라만(성직자) 출신 힌두교도입니다. 이민 2세로 옥스포드대학 최고엘리트 과정인 PPE(철학ㆍ정치학ㆍ경제학 복수전공)를 마치고 미국 스탠퍼드 MBA를 거쳐 골드만삭스에서 근무하다가 2015년에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7년만에 총리가 됐습니다. 210년만의 최연소 기록입니다. 부인이 인도 IT재벌 딸이라 재산이 1조원을 넘습니다.

2. 그런데 수낵은 백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목해야할 조직이 ‘1922위원회’입니다.

1922위원회는 보수당내 평의원 모임입니다. 평의원은 내각에 들어가지 못한 하원의원. 1922년 평의원들이 보수당 지도부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총선에서 압승하면서 1922위원회가 자리잡았습니다. 정부를 이끌어가는 건 지도부(내각)의 권한이지만, 내각에 문제가 있을 경우 들고일어나 총리를 밀어내는 곳은 1922입니다.

3. 이번 총리교체 과정에서 1922위원회의 역할이 빛났습니다.

경제를 망친 트러스 총리를 44일만에 끌어내리고, 단 5일만에 후임을 등장시킨 신속대응능력입니다. 1922위원회는 후임 당대표(총리) 후보자격으로 ‘소속의원 100명 이상 지지’를 요구했습니다. 과거 경선에서 후보자격을 ‘20명 이상 서명’으로 했는데, 후보가 난립해 결선투표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4. 1922의 막후조정으로 수낵이 보수당 의원 357명 중 190명의 지지를 확보해 단독후보가 됐습니다.

단독후보가 됐기에 경선 없이 바로 당선됐습니다. 경선 생략은 시간절약의 의미도 있지만,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인종차별 문제도 비켜가는 우회로였습니다.

5. 수낵은 지난 여름 트러스와 당대표 경선과정에서 토론을 더 잘했습니다.
트러스는 ‘감세와 재정확대’라는 상충된 공약을 내놓았고, 수낵은 ‘동화같은 얘기’라 비판했습니다. 누구도 내놓고 얘기는 안하지만, 당원투표에선 유색인종에 대한 거부감이 작용했습니다. 트러스가 당선됐고, 곧장 금융대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번엔 의원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일반당원투표를 우회함으로써, 피부색과 무관하게 능력 있는 후보를 뽑았습니다.

6. 350년 역사의 영국 보수당이 정당정치의 진면목을 보였습니다.
정부운영을 잘못할 경우 총리를 신속하게, 확실하게 교체하는 책임정치구현. 정부운영과 관련해선 총리의 권력집중을 인정하지만, 문제가 생겼을 경우 당차원에서 평의원들이 지도부교체를 요구하는 당내민주주의.
대통령제에서도 꼭 필요한 정당의 덕목입니다.
〈칼럼니스트〉
2022. 10.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