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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E 총재 “사흘간 포지션 정리해라”…커지는 영국발 금융위기 공포

중앙일보

입력

앤드류 베일리 영국 영란은행 총재

앤드류 베일리 영국 영란은행 총재

“이제 3일 남았다. 연기금은 이때까지 포지션을 정리해야 한다.”

앤드류 베일리 영국 영란은행(BOE) 총재의 한 마디에 전 세계 금융시장이 휘청였다. 베일리 총재는 1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국제금융협회(IIF) 연례총회에서 영란은행의 채권시장 개입에 대해 “계획대로 이번주 마지막 날(14일)에 중단할 것”이라며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중앙은행의 개입은 일시적이어야 하고, 결코 장기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영국 정부의 대규모 감세 정책 발표로 혼란에 빠졌던 세계금융시장이 또 한 번의 고비를 앞두고 있다. 채권 가격 급락을 막기 위해 지난달 28일 무제한 국채 매입으로 진화에 나선 영란은행이 발을 뺄 태세를 취하며 시장이 불안감에 휩싸인 것이다.

시장의 혼란을 촉발한 건 쿼지 콰텡 연국 재무장관이 지난달 23일 450억 파운드(약 69조원) 규모의 감세 계획을 발표하면서다. 세금을 줄이겠다고 하면서 재정 비용을 메울 재원 마련 계획을 설명하지 못하자 국채 발행이 늘어날 것이라 예상한 시장이 투매에 나섰다. 채권 가격은 폭락(금리 상승)하고 파운드화 가치도 급락했다.

채권 값이 떨어지자 SOS를 외친 건 영국의 연기금이다. 영국 국채의 비중이 높은 부채연계투자(LDI) 펀드들의 순자산이 마이너스에 가까워졌다. LDI에 투자한 연금생애저축협회 등 연기금은 마진콜(추가 증거금 납부 요구)을 받기 시작했다. 이들이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보유한 유동성 자산을 헐값에 매각하자 시장은 더 요동쳤고, 파산할 가능성이 커졌다.

요동치는 시장에 소방수로 나선 것이 영란은행이다. 지난달 28일 총 650억 파운드(102조원)의 장기 국채를 사들이기로 하면서, 시장 개입 마감 시한을 오는 14일로 못박았다. 시장이 흔들리자 지난 10일엔 긴급 국채 매입 규모를 하루 50억 파운드(7조7500억원)에서 100억 파운드로 늘리고, 11일에는 물가연동채도 오는 14일까지 하루 최대 50억 파운드씩 사들이겠다고 발표했다.

마감 시한이 다가오자 영국 연금생애저축협회 등은 영란은행에 적어도 이달 말까지 채권 매입 프로그램을 연장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사흘의 말미를 강조한 베일리의 선 긋기로 시장의 기대는 무참히 꺾였다. 베일리 총재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며칠 동안 밤을 새웠지만 중앙은행이 특정 부문을 겨냥해 정밀하게 시장에 개입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베일리 총재의 최후 통첩에 전 세계 금융시장은 급격히 흔들렸다. 지난 10일 연 4.42% 수준이던 영국 30년 만기 국채 금리는 베일리의 발언 뒤 급등해 12일 오후 4시 기준 연 4.92%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다. 파운드화 가치도 폭락해 12일 장중 파운드당 1.092달러까지 떨어진 뒤 오후 4시 현재 파운드당 1.102달러 선에서 거래 중이다.

앞서 뉴욕 증시는 베일리의 발언이 전해진 뒤 급락세로 전환해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 지수는 0.65%, 나스닥 지수는 1.1% 하락했다. 다우존스 지수는 0.12% 오른 채 장을 마쳤다.

베일리 총재가 채권 매입에 소극적인 것은 치솟는 영국의 물가 때문이다. 지난 8월 영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1년 전보다 9.9% 상승했다. 물가상승률이 10%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영란은행이 국채 매입에 나서면 시중에 돈이 풀리게 되고, 이는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압력이 더 커지게 된다.

베일리가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개입은 금리 인상과 상충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영란은행도 긴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올해 초 0.25%이던 기준금리는 현재 2.25%로 2.0%포인트 높아졌다. 지난 8월과 9월에는 연달아 0.5%포인트(빅스텝) 인상에 나섰다.

세계금융시장의 초조한 시선은 오는 14일 이후의 영국으로 쏠린다. 영란은행이 시장 개입을 중단한 뒤에도 채권 시장이 진정되지 않아 연기금의 자산 투매가 본격화하면, 자산 가격의 하락이 전 세계 금융시장으로 번져나갈 수 있어서다. 영국발 금융위기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피에르-올리비에르 고린차스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지금 영국은 하나의 운전대를 두 사람이 잡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돌리고 있는 차와 같다”며 “세금 감면을 하는 확장적 재정 정책과 인플레이션을 낮추기 위한 통화 긴축을 교차해서 작동하는 건 인플레이션을 연장할 뿐이며 심각한 금융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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