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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훈 칼럼

우리는 멜로니의 함정을 피할 수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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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장훈 중앙대 교수·본사 칼럼니스트

장훈 중앙대 교수·본사 칼럼니스트

이탈리아하면 먼저 무엇이 떠오르시는지? 마늘과 올리브가 듬뿍 들어간 이탈리아 음식? 정열적인 사람들? 피렌체?

우리네 일상적 관심을 넘어서기는 어려운 이탈리아에서 얼마 전 전 세계를 향한 경보가 울려 퍼졌다. 지난 9월 25일 총선 결과 총리에 오르게 된 이탈리아 형제당 대표 조르지아 멜로니의 등장은 극단주의 정치가 더 이상 일회적 사건도, 국지적 현상도 아님을 상징한다.

40대 중반의 환하고 매력적인 미소 뒤에는 악몽의 그림자들이 어른거린다. 멜로니는 대공황의 여파 속에서 이탈리아와 유럽을 전쟁과 광기로 몰아넣었던 무솔리니를 찬양하는 이탈리아 파시즘의 후예를 자처한다. 이탈리아의 전통을 극단적으로 앞세우며 이민자, 소수자에 대한 적대감을 강렬하게 드러낸다. (현실은 이탈리아 노동 인구의 10%가 이민자들이다.)

이탈리아 멜로니, 극단정치 상징
부채와 양극화가 극단정치 불러
기성정치 부패와 무기력도 한 몫
윤 정부, 국가부채 악순환 막아야

스웨덴 총선, 프랑스 대선의 극우정당 약진에 이어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 찬양 정당이 집권하게 되었지만, 우리는 그리고 세계는 여전히 한가하게 바라볼 뿐이다. 한가한 비평들: 멜로니가 트럼프보다는 덜 과격하지 않을까? 세계 지정학을 좌우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젤렌스키 정부를 공개 지지하는 걸로 봐서, 멜로니가 자유주의 세계와 완전히 척질 생각은 없지 않은가? 한가한 비평의 이면에는 21세기형 극단주의 정치에 대한 안이한 인식이 있다. 20세기를 피로 물들였던 20세기 극단주의 정치는 국가폭력과 테러, 군복, 공포정치로 무장하였었다. 스탈린, 히틀러, 무솔리니 등.

한편 21세기 극단주의 정치는 유사 파시즘, 극우 포퓰리즘, 그 어떤 이름으로 부르던 간에 20세기와는 다른 세련된 분장을 하고 있다. 백인 이탈리아인과 이민자들을 갈라 치면서도 극단의 분열 정치를 따듯함, 가정, 신앙의 분위기로 포장한다. “저는 조르지아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저는 엄마입니다.”(멜로니) 안으로 분열을 조장하고 밖으로 문을 닫아 거는 폐쇄 정치를 따듯한 말들로 포장하며 사람들 마음을 파고든다. 준비된 경제정책은 하나도 없지만 고리타분한 기성정치를 공격할 때의 예리함은 비수와도 같다.

멜로니, 트럼프, 에르도안의 사례에서 보듯이 세련된 방식으로 언론 자유를 억누르고 가짜뉴스를 눈 하나 깜짝 안하고 퍼뜨리면서 세계를 어둠으로 몰아가는 21세기 극단주의 정치는 유럽, 미국, 아시아 곳곳에서 착착 세력을 넓혀가는 중이다.

결국 질문은 우리에게로 향한다. 우리는 과연 안전한가? 멜로니 정권을 탄생시킨 이탈리아 증후군에서 우리는 자유로운가?

①첫째, 1990년대 이후 급격하게 쌓여온 정부 부채라는 문제가 있다. 국내총생산(GDP)의 무려 150%에 이르는 거대한 정부 부채는 이탈리아 정부를 옴짝달싹 못하도록 만드는 저주이다. 국가 빚이 이 지경에 이르면 성장은커녕 양극화만 심화될 뿐이다. 나라 경제를 옭아매는 부채가 한 순간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인기를 위해 빚을 내서라도 돈 풀기를 남발해온 정치인들과 그들을 지지한 유권자들의 무책임이 쌓이면서 빚은 감당 못하게 부풀어 오른 것이다.

②정부 씀씀이를 줄이고자 개혁정책에 나섰던 실용 정부가 이탈리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치암피 정부(1993), 디니 정부(1994)를 이끌었던 이들은 이탈리아 중앙은행장 출신으로 나름의 지출개혁을 시도했었다. 하지만 전문 관료들이 이끄는 정부는 개혁에 필요한 에너지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허망하게 사라져갔다. ③부패하거나 무능한 기성정치의 실패가 반복되면서, 이탈리아 유권자들은 반(反)정치를 앞세운 멜로니의 극단주의 정치에 빠져들었다.

지난 정부 5년간 우리 정부 빚은 660조원에서 1070조원으로 늘어났다. GDP 비중으로는 36%에서 50%로 팽창한 엄청난 숫자이다.(기획재정부) 빚이 쌓이던 지난 5년간 한가한 논쟁이 이어져왔다. 아직도 빚낼 여력이 많다느니, 주요국들과 비교하면 안전한 수준이라는 말들이 한가롭게 오가는 동안 정부와 유권자 일부는 빚잔치에 서서히 중독되어왔다.

결국 관료정부의 색채가 짙은 윤석열 정부는 인기는 없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를 떠맡고 나섰다. 중앙정부뿐만 아니라 지방정부, 공기업들에게 허리띠를 졸라매라 재촉하고 재정 건전화의 총대를 메고 나섰다. 관건은 여소야대, 낮은 지지율 등 정치 자본이 넉넉지 못한 윤 정부가 과연 반대세력의 저항을 돌파하는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출범 4개월이 지난 윤석열 정부가 치암피, 디니 정부가 드러냈던 관료정부의 한계에 갇히게 될 것인지, 아니면 기적적으로 빚잔치를 멈춰 세울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윤 정부가 실패한다면 이는 단지 한 정부의 좌초로 끝나지는 않는다.

빚잔치, 무기력한 정부, 시민들 삶의 양극화라는 3중 파도가 쌓이다 보면 한국의 멜로니가 등장하기에 좋은 토양이 된다. 화려한 언변과 재치로 무장하고 등장하겠지만, 멜로니가 여는 문은 세련된 21세기형 극단주의 정치로 가는 길로 통한다.

장훈 중앙대 교수·본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