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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기찬의 인프라

규제는 그대로, 구호만 난무하는 조선업 원·하청 대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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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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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대우조선해양 하청업체 노조의 점거 파업이 끝난 뒤 이중구조 문제가 불거졌다. 원청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의 실상이 드러났다. 윤석열 대통령은 8월 1일 “조선업 이중구조 개선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정부는 “조만간 대책을 내놓겠다”고 수차례 공언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조선 3사 대표를 불러 “주도적 역할을 해달라”며 압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7월 22일 51일간의 대우조선해양 파업 뒤 금방 나올 것 같던 대책은 두 달여가 지난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다. 정부 실무자는 “그렇게 (이중구조 대책이) 뚝딱 나올 사안이 아니다”며 난감해했다. “조선업의 역사, 글로벌 조선 산업에서의 경쟁력과 흐름, 원·하청 구조만으로 해석할 수 없는 산업의 구조적 특성 등 고려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는 말을 덧붙여서다.

정부 “개선책 곧 내겠다” 공언
두 달 넘도록 미궁에 빠져 헛바퀴
조선업 특성 고려 안 한 접근 한계
업종의 가려운 곳 푸는 게 첫 발

조선업 특유의 인력수급체계 ‘물량팀’

대우조선해양 하청업체 파업이 끝난 뒤 근로자들이 현장을 정리하고 있다. 조선업의 심각한 이중구조 개선이 숙제로 남았다. [연합뉴스]

대우조선해양 하청업체 파업이 끝난 뒤 근로자들이 현장을 정리하고 있다. 조선업의 심각한 이중구조 개선이 숙제로 남았다. [연합뉴스]

조선업은 여느 산업과 다르다. 물건을 만들어 진열해놓고 소비자가 사 가기를 기다리는 구조가 아니다. 글로벌 시장에선 원청도 선박을 수주받아 납품하는 하청업체에 불과하다. 이러다 보니 조선업은 경기 부침이 심하다. 인력도 덩달아 출렁일 수밖에 없다.

2000년대 초반까지 조선업이 호황을 누릴 때는 STX·성동조선 등 중형급 조선소 설립 붐이 일었다. 인력이 달릴 정도였다. 임금 수준도 덩달아 오르는 등 근로자에 대한 대접도 괜찮았다.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자 상황이 급반전했다. 수주 물량이 급감하며 중형 조선소가 구조조정에 내몰렸다. 실직한 조선 근로자가 넘쳐나 정부가 대책을 마련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글로벌 시장에선 하청업체일 뿐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 대목이다.

조선업의 심한 인력 부침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인지도 모른다. 일감이 있는 곳을 찾아 메뚜기처럼 옮겨 다니는 물량팀이라는 독특한 인력 수급 체계가 나타난 것도 이같은 업종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은 임금이 원청 근로자의 절반 정도이지만, 1980~90년대 물량조의 일당은 20만원에 육박할 정도로 셌다. 단가가 최고를 찍을 땐 하루 25만~30만원을 훌쩍 넘겼다. “1980~2000년대 초에는 원청(근로자)보다 물량팀이 돈을 더 받아갔다. 회사의 정규직을 제안해도 손사래를 쳤다”는 게 조선 원청사 퇴직 근로자의 회고다.

한국이 일본을 누르고 조선 1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도 기술력 이외에 이런 인력 구조가 뒤를 받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부도 독특한 조선업의 인력 수급 구조를 산업체계의 한 형태로 인정하며 정책을 짰다. 이제 와서 고용구조를 개선하려 섣불리 덤벼들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권기섭 고용부 차관은 지난달 6일 조선업 이중구조 개선을 위한 전문가 간담회를 가진 뒤 “조선업은 수주산업으로 납기일을 맞춰야 하는 점, 날씨, 자재 수급, 공정 순서 등 수많은 변수가 작용하는 점 등 산업 특성상 일정 부분 재하도급이나 물량팀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인정했다.

사실 일본 조선업도 글로벌 시장에서의 하청구조를 피할 수 없었다. 한국에 세계 1위 자리를 내준 뒤 10여년 동안 일본 조선사는 신규 엔지니어를 단 한 명도 충원하지 않았다. 조선 관련 박사 학위 배출자도 급감했다. 한국에서도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한동안은 신규 박사 학위자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러니 정부가 숙련공을 비롯한 인력 양성을 공언할 수도 없는 처지다.

그렇다고 조선업의 수익성이 예전만큼 좋은 것도 아니다. 단가를 후려치는 중국과 경쟁하느라 저가 입찰에 허덕인다. 권 차관이 “수익성이 개선되지 않는 한 (하청업체 근로자의) 처우 개선에 한계가 있다는 점에 현장 의견이 일치했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원·하청 구조에만 집착해 이중구조를 바라보면 마땅한 대책을 내놓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노사협의체는 노조 살찌우기일 뿐

일각에서는 노사협의체를 만들어 상생 방안을 마련하자는 얘기를 한다. 하지만 조선업에선 이마저도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실제 일을 하는 물량팀 목소리가 중요한데, 이들은 어찌 보면 뜨내기식 근로를 한다. 인력 구조상 조선산업의 쌀 격인 물량팀이 노사협의체에 낄 수가 없다는 얘기다. 익명을 요구한 경제학 교수가 “결국 기득권 노조가 참여할 것이고, 기득권 노조 살찌우기로 흐르게 될 것”이라고 하는 까닭이다.한 조선사 임원도 “노사협의체 운운은 조선업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이상론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 교수는 “숙련 중심의 임금체계 개편으로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해치는 차별적 보상제를 개선하고, 사회안전망으로서 기금을 조성하는 방식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문성현 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이 대우조선해양 파업 사태 당시 민주노총의 기득권 지키기 투쟁 방식을 비판하며 언급했던 방안과 유사하다.(중앙일보 7월 21일 자 4면) 다만 기금 조성은 결국 원청의 몫이 될 공산이 크다. 그렇다고 조선 3사에 무조건 돈을 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에 합당한 대가를 주는, 주고받기식이 돼야 가능하다. 한 원청사의 임원은 “획기적으로 규제를 푼다면 돈을 안 낼 이유가 없다. 통 크게 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어쩌면 조선 3사가 가장 가려워하고 싫어하는 것을 풀어주는, 규제 혁파가 조선업의 이중구조 개선을 위한 첫걸음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