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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기찬의 인프라

프리랜서 노동공제회, 작지만 의미있는 노동개혁 1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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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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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MZ세대에게 직장은 기성세대와 달리 청춘을 불사르는 곳이 아니다. “내가 왜 회사에 종속돼 내 모든 것을 투자하느냐”고 생각한다. 임원으로 승진하는 것도 마다한다.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과감하게 직장으로부터의 속박을 청산한다. 프리랜서로 전향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독립적인 경제활동을 꿈꾼다.

이걸 가능하게 한 건 디지털 혁명으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이다. 이른바 긱(Gig) 경제가 보편화하고 있다. 산업현장도 필요에 따라 임시로 계약을 맺고 일을 맡긴다. 출·퇴근하며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일하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

한국노총 조합원 6억 모금이 밑거름

노동시장의 이런 변화에 법은 요지부동이다. 1970~80년대 만들어진 공장 노동법은 여전히 공장에서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근로자를 보호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러다 보니 긱 경제의 바람을 타고 확산하는 프리랜서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는 사각지대에 방치될 수밖에 없다. 법상 이들의 신분은 사업자다. 돈을 많이 벌면 별 상관이 없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프리랜서가 수두룩하다. 대리운전 기사, 가사 노동자, 배달 라이더, 온라인 콘텐트 창작자, 택배기사, 위탁판매원, 프리랜서 강사 등은 오늘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느라 버겁다. 업무 특성상 일감이 없으면 생계 위협을 받는다. 국세청이 파악한 바로는 이런 사람이 670만명에 달한다.

대리기사·배달라이더·택배기사…
노동법 사각지대 노동자 670만
정치권 다툼에 ‘권리보호’ 뒷전

안전교육·이동쉼터·적금지원 등
노동공제회, 노조의 새 방향 제시

배달라이더가 늘며 사고도 많다. 노조가 공제회를 설립해 이들을 대상으로 안전교육, 건강검진에 재산형성까지 돕고 있다. [뉴시스]

배달라이더가 늘며 사고도 많다. 노조가 공제회를 설립해 이들을 대상으로 안전교육, 건강검진에 재산형성까지 돕고 있다. [뉴시스]

물론 정부는 고용보험·산재보험과 같은 사회보험 가입 범위를 넓히면서 사각지대를 줄이려 노력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노동개혁의 방점을 ‘임금 근로자’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바꿨다. 일하면 누구나 국가가 정책으로 보호하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정치권의 다툼과 이해득실을 좇는 노사 간의 주판 튕기기에 개혁작업은 더디기만 하다. 그저 ‘보호’라는 구호 속에 정쟁과 싸움판만 난무한다.

1년 전, 이런 판을 깨는 일이 생겼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며 보듬는, 공감의 조직이 출범했다. 한국노총에 의해서다. 그렇다고 한국노총 산하기관은 아니다. 독립적인 재단법인이다. (재)한국플랫폼프리랜서노동공제회(이하 노동공제회)다. 정부나 노사의 간섭에서 벗어나 프리랜서를 위한 자조적 안전망을 구축하고, 협력해서 돕는 계모임 같은 조직이다.

김동만 이사장(전 한국노총 위원장,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은 “사람이 살아야지. 살도록 도와야지. 그게 길거리 투쟁으로 다 되나. 당리당략만 흔들어대는 정치권에 맡긴다고 될 일도 아니다”고 말했다. 노동공제회 탄생의 이유를 반어법으로 설파하면서 개혁에 미적대는 정치권이나 정부, 노사를 추궁한 셈이다.

노동공제회가 운영 중인 대리운전 기사를 위한 ‘심야 이동형 쉼터’. [사진 노동공제회]

노동공제회가 운영 중인 대리운전 기사를 위한 ‘심야 이동형 쉼터’. [사진 노동공제회]

처음 설립할 땐 ‘노조 조직률을 끌어올리려 우회로를 만든다’는 곱지 않은 시선도 감수해야 했다. 어려울 때 서로 돕는 상부상조라는 전통적 가치관과 순수함마저 흠집 낼 정도로 노사관계가 뒤틀릴 대로 뒤틀렸다는 방증이다. 그래도 꿋꿋했다. 한국노총 조합원들은 십시일반 모금 운동을 벌여 6억2000만원을 기금으로 내놨다. 이 돈을 밑천으로 밑바닥 노동자를 위한 사업을 하나하나 추진했다.

노동공제회가 하는 일은 노조가 하던 것과는 결이 다르다. 지난해 11월 ‘심야 이동형 쉼터(셔틀)’사업을 개시했다. 대리운전 기사가 모이는 곳에 배치해 잠시나마 쉴 수 있도록 하는 차량 쉼터다. 배달 라이더를 위해서는 안전교육을 한다. 월 10만 원짜리 적금에 가입하면 1년에 24만원의 응원금을 준다. 자격증을 취득하면 30만원의 응원금을, 취업 면접 때는 1회 7만원을 준다. 대형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게 지원한다. 갑자기 돈이 필요한 경우 신용도 등의 이유로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리지 못하는 프리랜서의 사정을 감안해 긴급자금도 대출해준다. 배달 라이더를 위한 오토바이 공동구매 등도 추진 중이다. 말 그대로 가렵고, 어렵고, 아쉬운 곳을 골라서 긁고 풀어준다. 4000여 명이 혜택을 받고 있다. 송명진 사무국장은 “노조가 기업과 교섭을 통해 임금 인상이나 근로조건 개선에 주력한다면, 노동공제회는 상호부조와 협동을 통한 경제적 위험 대비, 노동환경 개선, 복지증진, 자산형성 지원 등을 주로 한다”고 말했다.

“노사관계 떼 써서 해결하는 시대 지나”

박모(55·돌봄노동자)씨는 “우리 같은 사람은 건강검진 받기가 쉽지 않다”며 “공제회 덕에 검진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 씨는 이상 증상이 나와 대학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아야 했다. 이 또한 노동공제회가 지원했다. 박 씨는 “다행히 큰 이상은 없었다”며 “내가 아픈 것을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함께 염려해주는 동반자가 생겼다는 생각에 울컥했다”고 말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노사가 자율적으로 할 영역이 많다. 매번 떼쓰는 모양새로 비치는 것은 이런 자율 개선의 영역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며 “노동공제회가 더 깊이 뿌리내리고, 더 많은 공제회가 노사를 중심으로 곳곳에 태동한다면 살만한 세상이 그리 먼 얘기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공제회 홍보 포스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오로지 홀로 세상에 맞서 일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우리끼리 서로 돕고 의지하며 안정된 내일을 그리자고요.’ 서로 기대어 협력하는 이런 자율사업은 선진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조 주도의 자체 구휼, 구제, 지원, 증진, 개선 사업이다. 노조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