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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미술 거장 유영국의 딸, 나무·금속으로 추상을 빚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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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자연,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녹아 있는 유리지 작품들. 생명의 순환을 흐르는 물에 빗대어 표현한 ‘십장생과의 여행-수(水)·수(壽)’, 2007, 은, 석회석, 47.8x23.8x29.5㎝.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자연,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녹아 있는 유리지 작품들. 생명의 순환을 흐르는 물에 빗대어 표현한 ‘십장생과의 여행-수(水)·수(壽)’, 2007, 은, 석회석, 47.8x23.8x29.5㎝.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호수, 갈대, 바람, 그리고 바다와 작은 섬···.

그는 은과 금, 나무, 백동, 알루미늄으로 자연을 빚었다. 구불구불 흐르는 강물은 그의 손끝을 거쳐 호두나무 쟁반 위에 은빛 물길로 되살아났다. 자연과 생명에 경외감 어린 그의 시선은 죽음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다. 망자(亡者)를 기릴 향로와 잔, 유골함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골호 ‘삼족오’(2002), 은, 27x18x16㎝.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골호 ‘삼족오’(2002), 은, 27x18x16㎝.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한국 현대공예를 대표하는 금속공예가 고(故) 유리지(1945~2013)의 대표작을 소개하는 전시가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달 27일 개막한 기증특별전 ‘사유(思惟)하는 공예가 유리지’전이다.

유리지

유리지

작가가 세상을 떠난 뒤 작품과 자료를 관리해온 유족은 지난 여름 총 126건 327점을 공예박물관에 기증했다. 37억 2800만원에 상당하는 가치다. 작가의 시대별 대표작과 더불어 그와의 협업으로 동생 유자야(74)씨가 제작·판매했던 금속 장신구와 칠보 은기, 황금 찻잔 컬렉션도 함께 기증됐다. 유족은 작품과 함께 6억원 규모의 상금도 기부할 예정이다. 박물관은 유족의 뜻을 이어 격년으로 한국 공예작가를 선발하는 ‘서울시 공예상’을 신설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겨울섬’, 1988, 알루미늄, 은, 나무, 페인트, 22x44x28㎝.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겨울섬’, 1988, 알루미늄, 은, 나무, 페인트, 22x44x28㎝.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유 작가는 서울대 미대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하고 1970년대 미국 유학(템플대 대학원)을 다녀오며 국내에 선진 금속공예 기법을 들여왔다. 1981~2010년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했고, 2004년 국내 첫 공예 전문 미술관 ‘치우금속공예관’을 설립했다. 2013년 2월 혈액암으로 급작스레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한국 추상미술 1세대 거장 유영국(1916~2002)의 장녀이기도 하다. 딸은 공예의 길을 택했으나, 작품을 통해 고향 울진의 자연을 추상적으로 형상화해 표현했다는 점에서 아버지를 닮았다. 아버지가 울진의 산과 바다를 추상화해 캔버스에 담았다면, 딸은 금속을 재료로 구름과 바람, 바다를 3차원 추상으로 빚었고 생활에 쓰이는 기물이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유수’, 2010. 은, 금부, 호두나무, 옻칠.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유수’, 2010. 은, 금부, 호두나무, 옻칠.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전시는 총 4부로 구성됐다. 생전의 작업실을 재현한 1부 공간에선 1960~70년대 작품과 가족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곡선의 조형미가 빼어난 크리머(1975~76), 아버지를 위해 만든 지팡이(1977), 어머니 김기순(102)을 표현했다는 액자 ‘속삭임’(1981)이 눈길을 끈다.

그의 작품에서 제목을 차용한 2부 공간( ‘바람에 기대어’)에선 자연을 시적으로 표현한 작품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삶을 흐르는 물에 빗대어 생명의 순환을 표현한 ‘십장생과의 여행-수(水)·수(壽)’(2007)는 작가의 인생관과 완성도 높은 주조 기술이 조화를 이룬 대표작으로 꼽힌다. 생명의 순환을 흐르는 물에 빗대어 표현했다.

다양한 유골함(골호·骨壺)도 전시됐다. 그 중 상상의 새 ‘삼족오(三足烏)’로 장식한 은제 유골함은 두 손으로 감싸 쥘 수 있는 크기에 알 형태의 몸체, 돌 질감의 표면, 삼족오가 날렵하게 조각된 덮개의 조화가 빼어나다. 이소현 학예사는 “그는 공예가가 사람의 삶을 아름답게 마감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작업했다. 2000년대 초반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지자 잘 준비해서 보내드리자는 생각으로 골호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김수정 서울공예박물관장은 “이번 기증특별전을 통해 일상을 보다 특별하게 만드는 공예의 매력을 새롭게 느끼길 바란다”고 말했다. 관람료는 무료, 전시는 11월 2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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