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하경 칼럼

윤 대통령, 억울해도 싸움은 중단해야 한다

중앙일보

입력 2022.10.03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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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윤석열 대통령은 몹시 억울한 심정일 것이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만나고 나오면서 발설한 사담(私談) 한마디가 순방외교를 통째로 집어삼킨 ‘비속어 파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MBC 보도와는 달리 대통령은 “바이든”을 언급한 기억이 없다.

1999년 6월 김대중 대통령도 비슷한 상황에 내몰렸다. 난제(難題)인 미·중·일·러 4강 외교의 마무리 코스인 러시아에서 옐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했다. 국민의 환호를 기대했지만 ‘옷 로비’ 사건으로 사과해야 했다. 처음엔 “마녀사냥”이라며 펄쩍 뛰었지만 박지원 문화부 장관의 집요한 설득에 물러섰다. 야당의 총공세로 국회 청문회와 특검까지 거쳤지만 결론은 ‘실패한 로비’였다. 새롭게 밝혀진 건 앙드레 김의 고향이 ‘구파발’이고, 본명이 ‘김봉남’이라는 사실이었다.

김대중은 ‘실패한 로비’에도 사과
전투 모드 탈피는 대통령의 숙명
결자해지로 사과하면 ‘전쟁’ 끝나
야당도 자제 안 하면 역풍 맞을 것

하지만 민심은 로비 유무를 떠나 외환위기 와중에 고관대작과 재벌의 부인들이 강남 고급 의상실을 들락거린 사실에 분노했다. 김 대통령은 자신과 무관한 일이었고, 억울했지만 민심에 항복해 최악의 위기를 넘겼다. 대중과 호흡하는 정치는 직업 정치인의 산술(算術)로도 쉽게 포획되지 않는 신비한 생물이다.

윤 대통령을 곤경에 빠뜨린 비속어 파문의 출발점은 본인의 발언이다.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사과해야만 풀린다. “앞부분(이 ××)은 대통령도 상당히 혼란을 느끼는 것 같다”(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면서 핏발 선 야당과 언론을 이길 수 있을까. 사실 민심은 발언의 실체보다 “나는  잘못 없다”는 식의 태도에 화나 있다. 바이든도 폭스뉴스 기자에게 “멍청한 ×××(What a stupid son of bitch)”라고 했지만 한 시간 만에 전화로 사과하니 없던 일이 됐다. 대통령이 물러선 뒤 야당이 공격하면 역풍이 불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미 너무 나갔다. 해프닝에 불과한 비속어 발언을 물고 늘어져 박진 외교부 장관 국회 해임건의안을 무리하게 통과시켰고, ‘외교참사·거짓말 대책위’까지 만들었다. 사실 외교참사는 문재인 정권이 끝판왕이었다. 국빈 방문한 중국에서 대통령이 주로 ‘혼밥’을 먹는 홀대를 당했다. 체코를 방문했는데 정상은 해외 순방 중이었고, 말레이시아에선 인도네시아어로 인사했다. 브뤼셀 아셈 회의장에선 혼자만 단체사진을 놓쳤다. 민주당은 윤 대통령의 실수를 꼬투리 잡을 자격이 없다.

악화된 한·일 관계는 문 정부의 대표적 외교참사였다. 2015년 박근혜 정부가 성사시킨 위안부 합의는 최초로 일본 총리의 공식 사과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문 정부는 단칼에 파기했고, 시대착오적 죽창가를 불렀다. 대법원 판결로 강제징용 문제가 돌출하자 민주당 원로인 문희상 국회의장이 현실적 해법이 담긴 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됐다.

윤 정부는 전혀 다르다. 대통령이 외상(外相)으로 위안부 합의의 주역이었던 기시다 총리를 설득하고, ‘문희상안’을 되살려 한·일 관계 정상화를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박진 장관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무릎까지 꿇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일본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한덕수 총리를 만난 기시다 총리는 “피고(일본) 기업과 관련된 부분이 해결 방법에 포함되지 않으면 (한국의) 국민적 지지를 받기 힘들다는 인식을 일본도 갖고 있다”고 했다. 정파를 떠나서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지금 세계 경제는 발작을 일으키고 있다. 아시아에서 제2의 외환위기가 올 것이라는 경고도 있었다. 각자도생의 시대에 대외의존도가 유난히 높은 한국 경제는 ‘세계화의 저주’와 마주하고 있다. 북한은 선제적 핵 사용을 법제화했다.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북한은 핵 공격에 직면하기 싫으면 주한·주일 미군을 철수하라고 미국을 협박하고 있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이런 외환(外患)의 와중에 내우(內憂)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내부 총질을 멈추자고 정치권에 호소해야 한다.

인류 최초의 정치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2300년 전 『정치학』에서 “불평등이 파쟁의 원인”이라며 “중산계급은 반란과 파쟁의 위협에 가장 덜 노출돼 있다”고 갈파했다. 윤 대통령은 “경제가 어려울수록 가장 큰 타격을 받는 서민과 취약계층 지원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고 했다. 맞는 방향이다. 어느 시대에든 좋은 경제가 좋은 정치다. 여야는 내전을 중단하고 힘을 모아 경제난을 헤쳐나가야 한다. 그러러면 윤 대통령이 “부적절한 사적 발언으로 국민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드렸다”며 물러서야 한다. 소탈하고 인간적인 모습에 국민은 안도하고, 야당도 맥이 빠져 공격을 포기할 것이다.

대통령은 더 이상 권력을 놓고 싸우는 정치인이 아니다. 원수와도 화해하고 나라를 구해야 할 판이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탈피(脫皮)하지 못하는 뱀은 죽는다”고 적었다. ‘윤석열’은 대통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책임진 대통령은 실패할 권리가 없다. 억울해도 참아내고, 이 파멸적인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야 한다. 윤 대통령의 운명이고, 모두가 사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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