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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친은 낙태까지…유부남 들키자 "나 암이야" 붙잡은 그놈 최후 [가족의자격⑦]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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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자격

가족의 자격을 새로이 법원에 물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족연(緣)을 끊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법원은 어떤 해답을 줄까요. 또 법의 공백은 어떻게 채워야 할까요. 중앙일보가 새로운 가족의 자격을 묻습니다.

결혼 2년 차 남편 진수(가명)씨. 그는 나영(가명)씨와의 연애를 시작했다. 나영씨는 진수씨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현장에 출동한 렌터카 업체 사장이었다.  

진수씨는 나영씨에게 자신의 결혼 사실을 숨겼다. 진수씨는 아내가 아닌 어머니와 함께 사는 척했고, 자신의 카카오톡 프로필에 올라와 있는 자녀 사진은 '조카 사진'이라고 둘러댔다. 게다가 나영씨는 진수씨가 자신과 결혼할 생각이 있는 줄 알았다. 둘이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도 진수씨가 나영씨 부모님에게 선물을 보내거나, 여행경비를 대는 등의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만난 지 약 8개월이 지난 무렵, 나영씨는 우연히 진수씨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그런데 진수씨가 암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하는 등 집요하게 만남을 요구해 당장 끊어내지는 못했다. 이후 나영씨는 진수씨의아이를 임신했다가 낙태하기도 했다.

아내냐, 나냐. 진수씨의 선택을 기다리던 나영씨는 결국 진수씨 아내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진수씨의 결혼 생활은 파탄 났고, 이후 나영씨와 진수씨의 관계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나영씨가 진수씨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이다. 법원은 진수씨가 나영씨에게 900만원을 지급하라고 했다.
(※판결문 각색)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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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이 나영씨 손을 들어준 이유는 '성적 자기결정권' 때문이었다. 진수씨가 자신의 결혼 사실을 숨기고 마치 나영씨와 결혼할 것처럼 행동한 것은 나영씨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 불법행위라고 본 것이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성적 자기결정권은 '누구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부당한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상대방을 선택하고 성관계를 가질 권리'를 의미한다.

진수씨와 혼전 성관계를 가지는 것은 나영씨의 선택이고 책임이지만, 법원은 진수씨가 나영씨를 착오에 빠지도록 유도한 것은 아닌지를 살핀다. 나영씨가 진수씨의 기망행위로 인해 미혼남이라는 착오에 빠져 교제와 성관계를 이어갔다면,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된 것으로 본다.

법원은 "우리 사회의 혼인과 성행위에 대한 인식과 평가 등에 비추어 볼 때 상대방이 결혼을 한 사람인지 여부는 성관계를 맺을 상대방을 선택함에 매우 중요한 기초가 되는 사실"이라고 설명한다.

결혼 사실 뿐 아니라 직장까지 속여 위자료 액수가 올라간 사례도 있다.

기혼 남성 A씨는 한 술집에서 미혼 여성 B씨와 연락처를 주고받은 뒤 교제하기 시작하면서, 결혼 사실은 물론 이름과 직장, 직책을 모두 가짜로 댔다. 이때 A씨가 댄 신분은 남성 C씨의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A씨가 마치 자신이 C씨인양 행세한 것이다.  

법원은 "A씨가 여성 B씨의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며 10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했다. 또 신분을 도용당한 C씨에게도 위자료 300만원을 지급하라고 했다. A씨가 C씨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본 것이다.  

A씨가 C씨의 신분을 사용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여러 여자를 사귈 때마다 C씨인양 접근한 사실도 드러났다. 법원은 "C씨가 A씨 행세가 자신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밝히느라고 들인 노력의 정도 등을 두루 참작했다"고 밝혔다.  

법원은 결혼 사실을 숨기고 교제한 이들이 부담할 위자료 액수도 점차 늘리는 추세다. 2009년 11월 26일 헌법재판소가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형사 처벌은 불가능해졌지만 대신 민사적 책임을 물리는 것이다.

지난 2009년 헌법재판소가 혼인빙자간음죄 헌법소원 사건의 공개변론을 열고 있다. 중앙일보

지난 2009년 헌법재판소가 혼인빙자간음죄 헌법소원 사건의 공개변론을 열고 있다. 중앙일보

한편 과거 헌재가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주목한 것 역시 '성적 자기결정권'이었다.  

2012년 말 형법에서 사라진 혼인빙자간음죄(구 형법 제304조)는 과거 '혼인을 빙자하거나 기타 위계로써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를 기망하여 간음한 자'를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했다. 이 조항으로 기소된 남성들이 헌법소원을 내며 헌법상 사생활과 비밀의 자유,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됐다고 문제 삼았다. 처벌 대상을 남성으로 한정한 것 역시 평등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헌재는 이들 주장을 받아들였다. "남성이 여성을 유혹하는 방법은 남성의 내밀한 성적 자기결정권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애정 행위 속성상 과장이 수반되기 마련"이라며 "혼전 성관계 과정에서 이뤄지는 통상적인 유도행위까지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들에 대해 도덕적·민사적인 책임은 물을지언정, 국가의 형벌권을 행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혼인을 빙자해 간음한 사람은 가정, 사회, 직장 등 여러 방면에서 윤리·도덕에 의한 사회적 비난과 제재를 받을 것"이라며 "본질적으로 개인 간의 사생활에 속하는 행위까지 일일이 추적해 형법이 간섭할 필요는 없다"라고도 덧붙였다.

헌재는 당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역시 고려했다. 해당 법 조항이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를 보호 대상으로 하는 점을 주목한 것이다.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란 불특정인과는 성생활을 하지 않는 여성을 뜻하기 때문에, 결혼 전에 다수 남성과 성관계를 맺은 여성 등은 보호 대상에서 제외된다. 헌재는 이러한 법의 태도가 "여성에 대한 고전적 정조관념에 기초한 가부장적·도덕주의적 성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셈"이라고 짚었다.

성을 둘러싼 사회적 인식이 바뀐 점도 언급했다. "혼인빙자간음죄가 규정하는 '교활한 무기를 사용하여 순결한 성을 짓밟고 유린하는 남성'과 '성의 순결성을 믿고 있는 여성' 간의 대립항은 21세기 한국 사회에서는 더는 통용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가해자가 폭행·협박·위력을 동원해 사회적인 해악을 초래할 때는 강간죄 등으로 국가가 처벌하고, 그 외에 경우에는 형법이 개입할 분야가 아니다"라고도 했다.

한편 헌재가 2009년 내놓은 '성적 자기결정권'의 개념은 시간이 지나며 보다 구체화했다. 학계에서는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단계를 넘어, 누군가가 온전히 자기 결정을 행사하지 못하는 환경과 구조에 집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누군가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대상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기보다, 상대의 성적 자기결정권 역시 동등하게 행사됐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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