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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킹 신고해도 구속 2.7% 뿐...'잠정조치 4호' 절반이 기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화장실에서 여성역무원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전주환(31)의 신상정보가 19일 공개됐다.

 피해자 A씨에 대한 불법촬영 및 스토킹 혐의로 불구속 재판을 받고 있던 전주환은 1심 선고 하루 전날 범행을 저질렀다. A씨가 두 차례 고소했지만 지난해 10월 법원이 구속영장을 기각했고 지난 1월엔 경찰이 구속영장조차 신청하지 않으면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리되지 않은 게 참극의 배경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상 공개된 전주환. 사진 서울경찰청

신상 공개된 전주환. 사진 서울경찰청

 신고 이후에도 A씨처럼 가해자와 분리되지 못하는 건 다수 피해자들의 현실이다. 이미 경찰의 안전조치(신변보호)를 받던 피해자가 다시 스토킹을 시도하는 가해자를 신고하더라도 구속 수사가 진행되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것으로 나타났다. 19일 조은희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범죄피해자 안전조치(신변보호)를 받던 스토킹 피해자가 계속되는 가해를 경찰에 다시 신고한 건수는 지난해부터 올해 6월까지 총 7772건에 달했지만 구속수사가 진행된 건 211건(2.7%)에 그쳤다.

 구속영장 기각되자 SNS에 “판사 뭥미”, 이후 가해자 구속

 구속영장이 없이도 법원이 결정하면 재발 우려가 있는 가해자를 최대 한 달까지 유치장에 구금할 수 있는 분리수단이 스토킹처벌법상 ‘잠정조치 4호’다. SNS 인플루언서인 치과의사 이수진씨는 이 조치로 인해 스토커와의 분리돼 보호받은 사례다. 이씨는 “딸 남자친구 아킬레스건을 끊어버리겠다”등의 협박을 이어갔던 B씨를 경찰에 신고했지만 지난 6월 법원은 B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이씨가 SNS 등을 통해 “판사 뭥미(뭐임)”라며 영장 기각을 비판한 뒤 법원은 경찰이 신청한 잠정조치 4호를 인용했다. 경찰은 B씨를 구금한 상태로 폐쇄회로TV(CCTV) 영상을 확보하는 등 보강 수사를 벌여 같은달 A씨를 구속 송치할 수 있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잠정조치 4호 기각률 50% 넘어

 그러나 현실에선 이씨처럼 잠정조치를 통해 보호받는 피해자는 다수가 아니다.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스토킹처벌법 시행 후 지난 7월까지 신청된 486건의 잠정조치 4호 중 인용된 것은 채 절반이 안 되는 210건(기각률 56.8%)에 불과했다. ‘100m이내 접근 금지’(2호), ‘전기통진 접근 금지’(3호) 등을 포함한 잠정조치 전체 신청 4932건 중 755건(15.3%)만 기각됐지만 4호는 쉽게 인용되지 않았다. 잠정조치는 법원의 사후승인을 받아도 되는 긴급응급조치와 달리 검사의 청구를 거쳐 법원의 결정이 있어야 집행할 수 있지만 피의자의 인신을 구속하는 것이어서 법원이 신중한 태도로 보인 결과로 해석된다.

 위반시 과태료 처분(1000만원 이하)에 그치는 긴급응급조치(100m 이내 접근금지, 전기통신 이용 접근금지)는 잠정조치보다 신청 건수가 저조한 편이다. 같은 기간 긴급응급조치 신청은 2792건으로 잠정조치 신청 건수의 절반 수준이었다. 긴급응급조치 기각률은 9%였다. 긴급응급조치 위반해 과태료 처분을 받은 사람 10명 중 7명(수납률 30.9%)은 과태료를 미납 상태다.

 경찰은 스토킹처벌법을 개정하지 않고도 현행법상 가능한 긴급응급조치와 잠정조치 4호를 적극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19일 기자간담회에서 장기적으로는 스토킹처벌법을 개정해 긴급응급조치위반시 현행 과태료 부과 대신 형사처벌 상향, 긴급잠정조치 신설, 잠정조치 결정단계 축소(경찰→법원)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처음부터 잠정조치 4호를 신청하는 게 아니라 1~3호부터 거쳐 4호를 신청한다”며 “가장 높은 수준인 인신 구속에 대해선 법원의 통제가 필요하지만 가해자 과거 이력 등에 대한 경찰 판단으로 선 분리 조치가 이뤄질 수 있어야 효율적 강력범죄 예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스토킹처벌법 입법당시, 반의사불벌죄 주장한 법무부·경찰

 잠정조치나 긴급응급조치도 피해자가 처벌불원서를 작성하면 경찰이 신청할 수 없다는 점도 제도적 한계로 지적된다. 스토킹처벌법상 피해자 의사에 반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는 반의사불벌 조항(제18조 3항) 때문이다. 이 법 제정 때부터 여성 단체 등이 독소 조항으로 지적해 온 조항이다.

 법무부는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을 계기로 ‘반의사불벌죄’ 조항 삭제 검토에 나섰지만 뒷북 대응이란 비판이 나온다. 지난해 3월 입법 과정에서 법무부는 이 조항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지난해 3월 22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당시 이용구 법무부 차관은 “스토킹 정의 자체가 피해자 본인 의사에 반해 접근하는 행위를 방지하고 있기 때문에 피해자 의사에 기초해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송민헌 당시 경찰청 차장도 “처벌불원서를 써 주면서 ‘다시는 나한테 오지 마라’며 사적으로 해결할 필요성이 있다”며 동의했다.

19일 서울 중구 신당역 내 여자화장실 앞에 마련된 '신당역 스토킹 사건' 피해자 추모공간을 찾은 시민들이 애도를 표하고 있다. 뉴스1

19일 서울 중구 신당역 내 여자화장실 앞에 마련된 '신당역 스토킹 사건' 피해자 추모공간을 찾은 시민들이 애도를 표하고 있다. 뉴스1

 당시 정부 판단과 달리 스토킹처벌법 시행 이후 반의사불벌죄 악용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민경 경찰대 교수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합의를 이유로 정당하게 접근하기도 하고 해당 조항으로 아예 범죄사실이 없었던 것처럼 되기도 한다”며 “일단 합의가 되면 수사가 멈추기 때문에 수사 기관 입장에서도 열심히 수사할 유인이 사라지는 셈”이라고 말했다. 서혜진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재범 우려가 큰 스토킹 범죄자들이 합의를 학습하게 되는 등 여러 부작용이 있어 반의사불벌죄는 폐지돼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21대 국회에 계류 중인스토킹처벌법 개정안은 15건이다. 여야 모두 반의사불벌죄 조항 폐지에 동의하고 있어 개정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윤희근 경찰청장도 “(반의사불벌죄 삭제에) 적극적으로 찬성한다”고 말했다. 국회 여성가족위원장인 권인숙 의원은 “현행 스토킹 범죄 피해자 보호 지원 체계에는 사각지대가 많다”며 “수사기관의 입장이 아니라 피해자 입장에서 가해자 분리조치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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