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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잘 쓰는 130㎝ 팔방미인 “멜로 연기도 하고 싶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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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5호 18면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저신장 배우 김범진 

박지리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삼은 음악극 ‘합★체’에서 아버지 역을 맡은 김범진 배우. [사진 국립극장]

박지리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삼은 음악극 ‘합★체’에서 아버지 역을 맡은 김범진 배우. [사진 국립극장]

장애인이 장애를 잊은 채 공연을 즐기는, 본격 ‘무장애 공연’이 등장했다. 국립극장이 제작한 음악극 ‘합★체’(9월 15~18일)는 수어나 음성해설을 곁들이는 통상적인 배리어 프리 공연이 아니라, 장애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킨 무대다. 저신장 장애를 소재 삼았고 수어 통역사가 그림자 배우가 됐으며, 음성해설사는 곧 라디오DJ 역 배우다. 몇 년 새 배리어 프리가 공연계 트렌드가 되고 있지만, 국립 공연기관이 팔걷고 나서 눈길이 쏠렸다. 유료 관객 중 장애인 비율도 8%에 달한다.

한때 개그맨 꿈, 고교 때 연기에 매료

최근 화두인 ‘장애인 당사자성’도 돋보인다. 수어 대본을 농인이 직접 번역했고, 장애인 역할은 장애인 배우가 연기한다. 저신장 장애인의 쌍둥이 아들의 성장통을 그린 무대에 아버지 역을 맡은 게 저신장 배우 김범진(34)이다. 극단 여행자 소속으로 ‘페리클레스’(2015), ‘코리올라누스’(2021) 같은 대작에 출연했고, 안은미의 ‘대심땐쓰’(2017) 등 현대무용 작품에서 춤도 추는 팔방미인 아티스트다.

130㎝. 미드 ‘왕좌의 게임’의 피터 딘클리지가 떠오르는 왜소한 체구지만 그늘이라곤 없다. 무대에서도 시종 노래하고 춤추느라 바쁜데, 요즘 기분이 참 좋단다. ‘우리들의 블루스’‘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등 장애인을 소재 삼은 드라마가 화제가 되면서 섭외도 많아지고,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우리나라 문화계도 많은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걸 느껴요. 예전에는 장애를 건드릴 엄두도 못냈잖아요. 매체 영향력이 크더라고요. 사실 ‘왕좌의 게임’ 이전에는 동료들이 저를 볼 때 ‘노력해도 쉽지 않을거야’라는 시선을 느꼈거든요. 근데 요즘에는 ‘진짜 멋있다. 너, 괜찮을 것 같은데?’라는 식으로 바뀐 것 같아요. 저도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리어 프리 공연을 종종 해봤지만, 이번엔 좀 다르단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나 안 가진 사람이나 똑같이 공연에 몰입하도록 짜여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청각장애인을 위해 단순 통역사가 있는 게 아니라, 수어 배우가 2인1조가 되어 같이 퍼포밍을 하는 시스템이죠. 제가 저글링을 할 때 뒤에서 공을 받아준다거나, 후프를 같이 잡고 넘어가는 식으로  합을 맞춰 동작을 짰어요. 그래서 일반인들이 봐도 재미가 있고 장애인들은 저절로 빠져들게 되죠. 저도 수어를 모르지만 동작만 봐도 재밌더군요.”

‘좋은 공이 가져야 하는 조건. 그중 제일 중요한 건 공의 탄력도. 땅에 떨어져도 다시 튀어오를 수 있는 힘. 절대 깨지지 않고 힘차게 힘차게 튀어오를 힘.’ 극중 아버지의 노래이자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다. 그의 부모님은 멋진 말보다 그가 장애가 있다는 걸 잊게끔 평범하게 잘 키워주셨단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특수반에 보내라는 제의를 했을 때 엄마가 극대노하시던 기억이 나네요. ‘애가 사지가 멀쩡한데 무슨 특수반이냐’면서요(웃음). 사춘기 시절엔 ‘괜히 태어나서 부모님 신경쓰이게 한다’는 생각에 울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너는 장애가 있어도 없는 거라고 끊임없이 말씀해주셨어요. 건강하게만 커주는 게 선물이라면서요.”

연출가 양정웅의 ‘페리클레스’로 데뷔

음악극 ‘합★체’의 한 장면. [사진 국립극장]

음악극 ‘합★체’의 한 장면. [사진 국립극장]

“출퇴근시간 지하철에서 키 큰 남자 엉덩이를 마주할 때 가장 민망하다”는 식으로 불편을 웃음으로 흘려보내는 그는 원래 개그맨이 꿈이었지만, 고등학교 연극반에서 연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워낙 나대는 성격이라 학교에서 애들 웃기는 게 좋았어요.(웃음) 개그맨에게 연기도 필요하니까 연극을 해봤는데, 배역에 몰입하는 재미에 빠졌죠. 제 신체로 웃기는 개그는 보는 사람도 편하지 않을 것 같았고요.”

배우 도전은 좌절의 시작이었다. 연기학원에서 입시를 준비해 대학 연극영화과를 나와 단역부터 시작하는 평범한 코스가 그에겐 가장 먼 길이었다. “춤과 노래를 좋아하니 뮤지컬을 하고 싶어서 20대 초반에 ‘맨오브라만차’ 앙상블 오디션을 보러갔어요. 잘생기고 키크고 몸좋은 수십명이 연습실에 모여서 5분동안 똑같은 춤을 맞춰야 하더군요. 뭐라도 하고 싶어 간 건데, 애초에 저처럼 튀는 사람은 앙상블을 할수 없는 거예요. 남들처럼 앙상블로 시작해 차근차근 성장 할 수 없고 처음부터 배역을 받아야 하는데, 저를 뭘 보고 배역을 맡기겠어요.”

하지만 연출가 양정웅이 그의 ‘몸쓰는 법’을 눈여겨 보면서 운이 트였다. 무려 예술의전당에서 ‘페리클레스’로 데뷔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신체를 잘 쓰는 것’이 그의 화두다. “극단 여행자 오디션에서 연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해 팝송에 맞춰 현대무용 안무를 창작해서 보여드렸거든요. 양정웅 연출님이 몸 쓰는 것이 놀랍다면서 저를 뽑아주셨어요. 연출님이 신체를 엄청 쓰는 스타일이시라 자연스럽게 무용 공연에 나갈 기회도 생겼죠. 무용을 하면 내 몸의 움직임을 더 잘 알게 되서 좋아요.”

롤모델도 짐 캐리, 베네딕트 컴버배치 처럼 신체 활용의 달인들이란다. 그가 주어진 신체를 사용해 꼭 해보고 싶은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다. 올해 초 배우 황정민이 온몸을 비틀며 무대를 누비는 고난도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긴 연극이다. “황정민의 카리스마를 넘어설 수 있느냐고요? 콜록콜록. 그런 대배우만 할 수 있다면 엄두도 안내겠죠. 신체적인 콤플렉스가 비극으로 이어지는 역할인데, 요즘 제의받는 게 다 긍정적이고 밝은 역할이라 좀 못된 걸 해보고 싶어요. 실제로 비슷한 장애를 갖고 있으니 제 안에 묵혀진 콤플렉스가 있거든요. 지금은 가면을 쓰고 있지만요.(웃음)”

‘땅에 떨어져도 튀어오를 수 있는 회복 탄력성을 갖추라’는 ‘합★체’의 메시지처럼, 그가 요즘 좌절 속에서도 도전하고 있는 건 매체 연기다.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단역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서다. “주인공 욕심은 없어요. 이번 공연처럼 분량은 작아도 명확하게 각인될 만한 배역을 맡고 싶죠. 기회가 많아지니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요. 피터 딘클리지 같은 느와르 연기도 욕심나고, 멜로 연기도 해보고 싶어요. 사랑의 감정이 궁금하거든요. 많은 관객이 기억하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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