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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드러누우면 못 일어나, 늘 서 있어야 하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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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3호 19면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신작 내놓는 현대무용가 안은미

현대무용가 안은미가 9월 두 개의 신작을 내놓는다. 안무가가 두 작품을 동시에 창작하는 것도 흔치않은데,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기인 안은미답게 두 작품이 전혀 다르다. 인도네시아 무용수 5명이 두 달 전부터 입국해 함께 만들고 있는 ‘디어 누산타라-잘란잘란’(9월 1~4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은 지난 11주 동안 이어진 세종문화회관 ‘싱크넥스트22’ 시즌의 폐막작이고,  ‘2022 세계유산축전’의 일환으로 영주 부석사에서 펼치는 ‘기특기특’(9월 10~11일)은 우리 건축 유산에 숨결을 불어넣는 독특한 시도다.

23일 오전 서빙고동 개인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인근 안은미컴퍼니 스튜디오에서 전날 밤늦게 연습을 마치고 사무실에서 눈을 붙였다고 했다. 박그림 작가가 불교 탱화 스타일로 그린 안은미의 대형 초상화가 걸린 사무실은 충격적이었다. 점집 스타일이랄까. 핫핑크를 메인 컬러 삼아 온통 알록달록 색감으로 칠해 놓고 형형색색 잡동사니를 들여놓아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다. 침대와 주방은 있지만 갈아입을 옷 한 벌이 없었는데, “집에 가서 편하면 일어나기 싫어지니 사무실을 먹고 잘 수 있게 꾸며 놨다”고 했다.

박그림 작가가 불교 탱화 스타일로 그린 초상화 앞에 선 현대무용가 안은미. 최영재 기자

박그림 작가가 불교 탱화 스타일로 그린 초상화 앞에 선 현대무용가 안은미. 최영재 기자

한국무용가도 아닌데 곧잘 ‘명인’으로 불리는 그는 아마 가장 바쁜 ‘명인’일 터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지난해에도 아시아 5개국 MZ세대 무용수들과 만든 신작 ‘드래곤즈’로 유럽투어를 했고, 인도네시아를 들락거리며 ‘잘란잘란’ 무용수 캐스팅에도 1년여 공을 들였다. 그런데 왜 인도네시아일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결코 쉬지 않고 새로운 사람, 새로운 장소와 부딪치며 신작을 쏟아내는 그에게 1만 7000개의 섬에서 1300개 이상의 소수민족이 3000개 이상의 독창적인 춤 형식을 발전시킨 인도네시아는 영감의 보고일 수밖에 없다.

“인도네시아는 아시아 중에서도 좀 멀고 예술적인 페스티벌도 많지 않아서 가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2018년 인도네시아 댄스 페스티벌 초대를 받아 가보니 거기 무용수들 느낌이 다르더군요. 아직도 이런 몸이 있구나 싶은 게,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가 너무 순수하고 아름다운 거예요. 전부터 관심있던 아시아 프로젝트를 드디어 할 때가 됐구나 싶었죠. 1년에 걸친 오디션에서 뽑은 무용수들이 대부분 한국에 처음 왔는데, 한국어도 곧잘 배우고 한국에 대한 애정이 대단해요. 온몸을 불사르며 연습하고 있죠.(웃음)”

‘잘란잘란’은 인도네시아어로 ‘산책’이란 뜻이다. 춤의 기본인 ‘걷다’는 뜻의 ‘잘란’을 반복해 복수형으로 만든 말인데, 인도네시아 춤의 특징이랄 수 있는 ‘찰랑찰랑’ 동작을 연상시키기도 해서 제목으로 삼았다. “같은 나라라도 전혀 다른 지역에서 온 친구들이라 각자의 춤 스타일이 전혀 다른데, 공통점이라면 종교적인 춤조차 엉덩이를 많이 빼고 찰랑찰랑 화려하게 춤을 춘다는 점이에요. 신전에 있는 여신상처럼 팔을 꼬는 동작도 많고. 그런 움직임에 내 안무를 입혀서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가고 있어요. 과거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미래지향적으로, 우리가 만났을 때 할 수 있는 게 뭘까 찾는 프로젝트죠. 인도네시아 무용수들이 다른 나라 컴퍼니에 두달씩 와서 새로운 작품을 같이 짜는 경우는 처음일거라, 아주 중요한 작업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공동체 무브먼트 연구 ‘몸의 인류학자’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극락을 표현할 나비춤 독무. [연합뉴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극락을 표현할 나비춤 독무. [연합뉴스]

이런 교류는 점차 다문화 사회로 변모하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젊은 세대에게 공존의 화두를 던지는 일이기도 하다. “무용가들이 만날 한국적인 걸 찾지만, 우리가 가져가야 할 아시아성도 있다고 생각해요. 교류하다보면 미래를 위한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겠죠. 인도네시아가 많이 알려진 나라는 아닌데, 예술가들 보면 미래에 한바탕 할 것 같아요. 2018년에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이 열렸잖아요. 우리가 88올림픽 이후 부쩍 발전한 것처럼, 그런 국제적인 행사를 열고 나면 나라가 확 달라지기 마련이니까. 그들에게 배울 것도 많은데, 예술로 먼저 친밀해져야죠. 인도네시아 무용계에서는 이들이 한국 온 게 큰 이슈라는데, 앞으로 아시아 시대에 예술가들이 무엇을 해야 되는가, 숙제를 던지게 되겠죠.”

추석 연휴에 공연될 ‘기특기특’은 그가 처음 시도하는 장소특정적 공연이다. 문화재청이 주최하는 2022 세계유산축전의 일환으로, 국내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가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전달하려는 축전의 방향성에 맞춘 이동식 공연이다. 9월 10일과 11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매시 정각과 매시 30분에 부석사 일주문 앞에서 출발한다.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지어진 부석사 곳곳에 깃든 의미를 전시와 퍼포먼스로 풀어내는데, 일주문에서 시작해 1시간 동안 길을 따라 감상하며 무량수전 마당에 도착하면 깨달음의 경지에 입문하게 되는 코스다.

“내가 영주 출신이라 부석사의 오랜 팬이에요. 걸어가는 길목 길목이 너무 좋은 곳인데, 공터가 없어서 공연을 해봤자 고작 100명도 못 보겠더군요. 차라리 영화처럼 부석사의 이야기로 굴러가는 형식으로 만들면 인상적인 공연이 되겠다는 아이디어를 낸 거죠. 절이 되게 좁아서 99계단까지 계속 올라가야 하는데, 꼭대기에 딱 도착해서 뒤돌아보면 바람이 불어오게 건축을 해놨어요. 신선된 기분도 들고, 올라오며 힘들었던 걸 누가 위로해주는 것 같기도 하고. 거기 오르면 전경이 딱 ‘여기가 극락이구나’ 싶을 겁니다.”

마지막 코스인 무량수전에 이르면, 9개의 석축과 108개의 번뇌 망상을 통과해 만나는 극락마당에서 가사를 두르고 연꽃을 머리에 인 안은미의 독무가 펼쳐진다. 불교의 핵심교리인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광명을 향한 나비춤이다. “좁은 길을 따라 오르면서 길목마다 퍼포먼스로 이야기들이 이어지게 만들었는데, 무량수전에서는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극락세계를 표현하는 거죠. 나비춤이 원래 범패의 꽃인데, 내가 그걸 배워서 추는 건 의미가 없으니 나만의 나비춤을 출 거예요. 꼭대기 안양루는 오래된 보물이라 못 들어가는데, 공연을 위해 오픈해줬어요. 살짝 밟아보니, 서있기만 해도 기가 막히게 멋있는 곳이더군요.(웃음)”

“혹독하게 훈련해야 작품에 힘 생겨”

신작 ‘잘란잘란’은 인도네시아 무용수들과 협업하는 공연이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신작 ‘잘란잘란’은 인도네시아 무용수들과 협업하는 공연이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부석사를 이렇게 속속들이 공부하게 될 줄 몰랐다”는 그는 원래 자칭 ‘몸의 인류학자’다. 10여년 전부터 할머니, 고등학생, 중년남성, 장애인 등 춤과 무관한 일반인들의 움직임을 연구해 다 함께 춤추게 만드는 ‘공동체 무브먼트 리서치 프로젝트’를 계속해 왔다. 지금 한창인 아시아 프로젝트도 크게 보면 ‘공동체 무브먼트 리서치’의 일환이다. ‘전지구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알아가려면 몸으로 뛰어야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현지에 가봐야 되고, 관계도 직접 만나서 맺어야 되요. 되게 피곤한 일이지만, 그 고단함이 반드시 우리에게 공유할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주죠. 그 고단한 여정이 또 다른 근육의 힘을 만들고 그게 내 춤이 되니까요.”

‘몸의 인류학’의 성과는 뚜렷하다. 2012년 고등학생들이 추는 아이돌 댄스를 작품화한 ‘사심없는 땐스’만 해도 마치 지금의 K팝 댄스 열기를 예감한 것 같다. “우리가 추는 시대적인 춤의 지형도 같은 작업이니까요. 할머니들에게 춤 좀 춰 달라고 하면 막춤을 추는데, 아이들은 핸드폰에서 K팝 노래부터 검색을 하더군요. 이렇게 다르구나 느껴서 기록의 의미로 했던 건데, 요즘엔 세계 어딜 가도 길거리에서 K팝 댄스를 보게 돼요. 내가 예지력이 있었던 건지.(웃음)”

2018년부터 세계 공연예술의 메카인 파리 테아트르 드 라빌 상주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사실 2000년대부터 ‘춘향’‘심포카 바리’등이 유럽에서 더 사랑받으며 춤을 통해 한국의 아름다움을 알려온 K댄스의 조상이다. 어떤 사명감으로 애쓰는 게 아니라 ‘몸의 인류학자’로서 탐구할 뿐인데, “해외에선 늘 이런 건 처음 본다면서 반응이 뜨겁다”고.

“그저 하고 싶은 걸 하다보니 무용사에 발자국이 생겼는데, 스스로 대견해요. 개인 무용단이 이런 일을 계속하기 쉽지 않잖아요.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는 사람도 잘 없는데, 축복받은 거죠. 물론 그러기 위해 애초에 안정된 삶은 포기했어요. 예술가는 늘 불안정한 상황에 있어야 자극이 되거든요. 긴장감이 있어야 공부하게 되고 호기심도 생기지, 안정되고 드러눕기 시작하면 못 일어나죠. 그래서 우린 계속 서 있어야 되요. 평생 고단하고 혹독한 자기 훈련이 필요한 직업이지만, 내가 나와 약속한 길을 지키고 있기에 작품에 힘이 생긴다 생각해요. 말과 생활이 다르면 작품도 힘이 없죠. 보세요, 사무실도 내 작품처럼 컬러풀하잖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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