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 주연 정성화
“나 뮤지컬 진짜 많이 봤거든. 근데 이게 제일 재밌어.”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 1막이 끝나자 옆자리 관객이 동행에게 한 말이다. 웃을 일 없는 세상에 포복절도할 무대가 나타났다. ‘코미디의 제왕’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했던 30년 전 영화가 무대로 부활해 제대로 이름값을 하고 있다.
이혼 당한 중년 남자가 세 아이와 함께 있고 싶어서 가사도우미 할머니로 변장해 벌이는 좌충우돌에 박수가 절로 터져 나온다. ‘과연 무대에서 가능할까?’ 싶은 영화속 아슬아슬 명장면들을 라이브 퍼포먼스로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8초 만에 변신해야 하는 ‘퀵체인지’부터 탭댄스와 랩, 비트박스, 루프 스테이션 등 온갖 개인기를 총동원한 ‘쇼비즈니스 종합선물세트’를 실시간으로 구현해야 하는 주인공은 편집의 예술인 영상의 시대에 무대 배우의 존재감을 증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장 않고 생얼로 무대 오르는 건 처음
‘역대 가장 분량 많은 주인공’ 다니엘 역에 0순위로 캐스팅된 건 정성화(47)다. 공동 프로듀서인 샘컴퍼니의 김미혜 대표와 스튜디오선데이 박민선 대표가 둘다 기획 단계부터 그를 점찍었다는 후문이다.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을 비롯해서 제가 ‘고생 캐릭터’ 전문이니까요. 근데 이번 고생이 최고봉인 것 같아요. 1인 9역도 해봤지만 할머니 퀵체인지가 더 힘드네요. ‘생얼’로 무대에 서는 것도 처음이구요. 라텍스 가면을 썼다 벗었다 해야 하는데 메이크업이 번지거든요. ‘생얼’에 자신이 없어서 분장이 필수인 사람인데, 그걸 포기하더라도 꼭 하고 싶었어요. 고생스러워도 관객 반응이 빵빵 터지니 즐겁습니다. 저도 아이가 셋인데, 정말 재밌어 하더라고요.”
탭댄스와 비트박스, 랩, 루프 스테이션, 복화술 등 퍼포먼스를 익히는 과정도 험난했지만, 미국식 개그코드에 ‘K패치’를 장착해 토착화시키는 것도 배우의 몫이 컸다. “번역가와 배우의 협업이 잘됐달까요. 각본이 큰 뼈대는 있지만 개인기를 발휘하는 장면은 배우가 각자 만들어야 해서 아이디어를 적극 내야 했어요. 트리플 캐스팅인 임창정, 양준모 배우의 공연이 다 다르죠. 탭댄스나 루프 스테이션 같은 기술도 매일 따로 시간을 내서 조금씩 습득해야 했는데, 이만큼 공들인 작품은 오랜만인 것 같네요.”
평소 존경하던 로빈 윌리엄스가 했던 역할을 처음으로 맡았지만, 영화를 다시 보진 않았다. ‘완벽한 할머니’ 캐릭터도 한국 여배우들의 발성을 참조해 스스로 창조했단다. “로빈 윌리엄스가 영화 ‘굿모닝 베트남’에서 라디오 DJ 역할을 하는 걸 보면서 배우가 어떤 직업을 보여줘야 할 때 저 정도는 노력하고 연구해야 되는구나 감탄했던 기억이 나요. 그와 같은 역할을 맡게 돼서 영광이지만, 저는 제 스타일대로 만들어야 하니까요. 할머니는 김수미, 윤여정 두 분 사이 어딘가인데, 상황마다 조금씩 달라져요. 소리 지를 때는 김수미 선생님 쪽에 가까운 것 같네요.(웃음)”
관객 만족도가 높은 건 쇼뮤지컬이라고 마냥 가벼운 게 아니라 훈훈한 감동까지 갖췄기 때문이다. 그도 “한바탕 웃음 뒤에 가족의 미래를 상상해보게 되는 열린 결말이라 대단한 것 같다”고 했다.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명작인 것 같아요. 새삼 부부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됐죠. 애들에게 1등 아빠가 아내에게 꼴찌 남편이 된 이유는 뭘까요. 몰라서 그런 것 같아요. 아내가 평소에 어떤 고민을 하는지, 그동안 얼마나 참고 살았는지 몰랐던 거죠. 아내와 농담 따먹기만 할 게 아니라, 무슨 고민이 있는지 겁나더라도 물어보고 소통이 필요하단 걸 저 또한 배웠어요. 가족이란 게 가지가 많은 나무라서 바람에 흔들리기 마련이지만, 엄마아빠의 신뢰관계가 지탱해주는 거라 생각하거든요. 여기서 핵심적인 단어가 ‘지탱’이죠. 지탱해주는 에너지가 있으면 가족이 잘 유지되는 것이고, 에너지가 꺾이면 가족도 깨지는 것 같아요.”
다니엘과 다웃파이어의 변신 코드를 뮤지컬 ‘지킬앤하이드’의 시그니처 ‘Confrontation’의 패러디로 푼 장면도 있지만, 사실 늘 그렇게 두 얼굴을 오가는 게 정성화다. ‘레미제라블’의 장발장, ‘팬텀’의 팬텀, ‘레베카’의 막심처럼 웃음기 쏙뺀 진지한 얼굴과 ‘젠틀맨스가이드’의 다이스퀴스, ‘킹키부츠’의 롤라, ‘비틀쥬스’의 비틀쥬스처럼 익살 가득한 얼굴이다. ‘미세스 다웃파이어’로 한 시즌 웃기고 나면, 연말엔 ‘영웅’의 안중근으로 다시 비장해져야 한다. 넓은 스펙트럼은 거저 얻어진 건 아니다.
할머니 캐릭터는 윤여정과 김수미 사이
“식당으로 치면 여러 가지 메뉴를 파는 가게 아닐까요. 설렁탕 전문점이 아니라 ‘김밥○○’처럼 이것저것 다 파는 가게인데, 제 목표는 그 모든 메뉴를 다 맛있게 즐기게 하는 거죠. 어떤 메뉴건 최선을 다해 증명했던 것 같아요. ‘아이러브유’로 인정받아 계속 코미디를 할 수 있었고, ‘맨오브라만차’와 ‘영웅’으로 증명해 ‘팬텀’과 ‘레베카’까지 할 수 있었죠. ‘레베카’의 막심도 제작사의 제의를 받고 처음엔 안 어울릴 것 같다고 했는데,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레베카라는 여자에게 가진 원한과 분노를 표현이라는 미션을 수행하면 되는 것이지, 댄디한 외모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막심처럼 돈많은 부자 중엔 후덕한 사람도 많지 않나요.(웃음)”
개그맨 출신이지만 정성화는 ‘웃긴 사람’은 아니다. 코믹과 진지라는 두 얼굴 중 ‘본캐’는 진지에 가깝다. “평소에는 입에 거미줄 치는 편이에요.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좋아하지만 내가 농담하기 보다는 남의 농담을 분석하고 있죠. 지금은 내가 아니라 누구의 타이밍이라는 식으로 코미디도 학술적으로 접근하다보니 개그맨은 망한 거예요.(웃음) 개그맨 출신이라고 코믹 연기가 결코 쉽지 않아요. 잘해야 본전이고, 관객 반응에 더 영향 받으니까요. 어떤 날은 고개만 움직여도 빵빵 터지지만, 객석이 좀 비거나 잘 웃지 않는 관객을 만나면 멘탈을 다잡아야 하죠. ‘괜찮아, 재밌을 거야. 속으로 웃는 걸꺼야’라면서요.”
아이돌 가수를 비롯해 연예계에서 다른 일을 하다가 뮤지컬을 하는 경우는 많지만, 가장 성공적으로 전향한 케이스가 그다. 뮤지컬을 만나기 전엔 자칭 ‘뭘 해도 고만고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저는 평생 어디 가서 톱이라는 걸 경험해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요. 뭘 하든지 중간 언저리였거든요. 아예 못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게 그거예요. 그러다 데뷔작 ‘아이러브유’ 때 기립박수를 처음 맛보고나서 ‘다시는 여기서 내려오지 말자. 이 행복감을 오래 유지하자’ 다짐했죠. 그래서 늘 재미있는 도전이 되는 작품을 선택했고, 어떤 일을 하게 되더라도 최고의 순간을 찾으려고 노력해 왔어요. 그랬을 때 항상 결과가 좋았고, 덕분에 뮤지컬을 하면서는 딱히 굴곡없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뮤지컬 인생 20여 년 동안 단 한 번의 슬럼프도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도 “흑역사가 될 뻔한 순간도 최고의 순간으로 바꾸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으로 발탁되어 주목받던 시기도 그랬다. “외국 배우들을 만나도 장발장을 했었다고 하면 다시 볼 만큼 어려운 배역인데, 당시의 저에게 역부족이었어요. 막이 오르자마자 12분 동안 계속 노래해야 하는 극한직업이거든요. 힘이 다 빠지고 목이 상한 상태에서 가장 어려운 넘버 ‘솔릴로퀴’가 나오는데, 한번 삐끗하고 나니 트라우마가 생겼죠. 음 하나가 안 나서 신경정신과 상담까지 받을 정도였어요. 근데 무대 위 트라우마는 무대 위에서 풀어야 하더군요. 겁이 나도 부딪치는 수밖에 없었고, 한번 해내고 나니 조금씩 헤어나게 됐죠. 돌이켜보면 그 조차도 멋진 경험이 됐어요. 장발장으로 좋은 상까지 탔으니까요.”
‘다웃파이어’ 이후에도 정성화의 변신은 계속된다. 2019년 촬영했지만 팬데믹으로 개봉이 늦춰졌던 뮤지컬 영화 ‘영웅’이 연내 공개될 예정이라 무대와는 또 다른 얼굴을 선보이게 됐다. “한국에서 뮤지컬 영화 시장도 크게 열렸으면 좋겠어요. 한국 제작진이 만드는 영상 콘텐트가 영상미나 감각이 탁월하고, 좋은 뮤지컬 배우도 많으니 글로벌에서도 잘 될 것 같아요. 저도 그쪽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싶고, 무대에서의 도전도 계속할 겁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할 수 있는 게 뮤지컬이거든요. 다웃파이어도 60살이 되도 할 수 있는 역할인데, 체력이 관건이죠. 지치기 쉬운 나이가 됐으니, 이제 도전할 힘을 빼앗기지 않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