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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자 돌아선 상품수지…원화값 1380원 깨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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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수퍼 달러(강달러)’의 기세에 원화가치가 연일 올해 최저치를 갈아치우고 있다. 6거래일 연속 하락세를 이어가며 ‘1달러=1384.2원’까지 밀렸다. 원화의 날개 없는 추락에 심리적 저지선으로 여겨지는 ‘1달러=1400원’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반도체 업황 악화와 상품수지 적자 등 한국 경제에 빨간불이 켜지며 원화 약세가 더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7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화가치는 전날보다 12.5원 내린(환율 상승) 달러당 1384.2원에 거래를 마쳤다. 원화가치가 달러당 1380원 선 아래로 밀린 것은 2009년 4월 1일(종가 달러당 1379.5원) 이후 13년5개월 만이다.

개장과 동시에 원화가치는 달러당 1380원대로 미끄러지며, 장중 한때 달러당 1388.4원까지 밀렸다. 지난 5일 달러당 1370원 선을 넘어선 지 이틀 만에 1380원대까지 진입한 것이다. 원화가치는 지난달 31일부터 6거래일째 연저점을 경신했다.

원화가치 급락에 외국인과 기관이 동반 ‘팔자’에 나서면서 이날 코스피 지수는 2370선으로 밀려났다. 종가 기준으로 코스피 지수가 2370선까지 내려간 것은 지난 7월 19일(2370.97) 이후 처음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날 코스피는 전날보다 1.39% 하락한 2376.46에 장을 마감했다. 2400선 아래(2395.66)에서 출발한 코스피는 달러당 원화가치가 1380원대까지 추락(환율 상승)하면서 낙폭을 키웠다. 이날 유가증권시장에서 외국인은 4889억원어치, 기관은 2277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개인이 6883억원어치를 사들이며 방어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코스피 대장주인 삼성전자도 1.93% 하락한 5만6000원으로 밀려났다. 코스닥 지수도 1.45% 하락한 768.19에 장을 마쳤다.

이진우 메리츠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여전히 시장이 환율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데다 추석 연휴 이후 발표될 경제 지표에 대한 경계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렇게 원화가치와 증시가 약세를 보인 건 달러 강세와 함께 한국 무역전선에 빨간불이 들어오며 불안심리가 확대됐기 때문이다. 이날 한국은행에 따르면 7월 경상수지는 10억9000만 달러(약 1조5000억원) 흑자를 기록했다. 1년 전보다 66억2000만 달러 감소했다. 2011년 5월(-79억 달러) 이후 역대 두 번째로 감소 폭이 컸다.

특히 7월 상품수지(-11억8000만 달러)가 2012년 4월 이후 10년3개월 만에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했다.

경상수지 적자 땐 대외신인도 악영향…원화값에도 악재

원화가치가 속절없이 떨어지고 있다. 원화가 달러당 1384.2원까지 하락(환율 상승)한 7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 표시된 환율. 원화값이 달러당 1380원 선 아래로 밀린 것은 2009년 4월 1일(종가 달러당 1379.5원) 이후 13년5개월 만이다. [뉴시스]

원화가치가 속절없이 떨어지고 있다. 원화가 달러당 1384.2원까지 하락(환율 상승)한 7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 표시된 환율. 원화값이 달러당 1380원 선 아래로 밀린 것은 2009년 4월 1일(종가 달러당 1379.5원) 이후 13년5개월 만이다. [뉴시스]

7월 경상수지 흑자 규모(10억9000만달러)는 1년 전(77억1000만 달러)보다 85%가량 급감했다. 원유 등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며 수입이 수출보다 더 큰 폭으로 늘었다. 수출은 1년 전보다 37억9000만 달러(6.9%) 늘어난 590억5000만 달러였다. 반면에 수입은 602억3000만 달러로 105억2000만 달러(21.2%) 늘었다.

8월에는 경상수지가 아예 적자로 돌아설 가능성도 있다. 8월 무역수지는 사상 최대 적자(94억7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상품수지와 무역수지는 산출 방법과 기관이 달라 정확히 일치하지 않지만, 상당 부분 겹치게 된다.

김영환 한은 경제통계국 금융통계부장은 “8월 무역수지가 이례적으로 큰 폭의 적자를 봤다”며 “상품수지도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여 8월 경상수지가 적자 전환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경상수지는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배당 등의 계절적 요인이 반영되는 4월에는 종종 적자를 기록했다. 올해 4월에도 8000만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다만 4월이 아닌 시점에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한 건 2012년 2월(-25억8400만 달러)이 마지막이다. 8월 기준으로는 2008년 8월(-38억4500만 달러) 이후에는 흑자만 기록했다. 상품수지와 경상수지가 모두 적자를 낸 건 2012년 4월이 마지막이다.

엔·위안 등 아시아 주요국 통화 모두 약세

경상수지는 한 국가가 교역 등 경제활동을 통해 다른 국가로부터 벌어들인 소득이다. 기축통화국이 아닌 이상 경상수지가 적자일 경우 그만큼 빚을 내 메워야 한다. 대외신인도가 떨어지고, 원화가치 하락에 불이 붙을 수 있다. 그동안 단기외채 비율 등 대외건전성을 나타내는 각종 지표에 경고등이 들어왔을 때도 정부는 경상수지 흑자를 이유로 낙관론을 펼쳐왔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과 같은 수출 주도형 경제 체계에서는 경상수지가 자국의 통화가치 등 거시 경제 안전성에 큰 영향을 준다”며 “(경상수지 악화는) 한국에 들어오는 달러 흐름이 나빠진 것인 만큼 최근 원화값 하락(환율 상승)에도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전망도 밝지 않다. 중국 경기 둔화와 반도체 가격 하락 등으로 무역수지 적자가 이어질 수 있다. 한은도 전날 보고서를 통해 당분간 무역수지 적자가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놨다. 코로나19로 줄었던 해외여행이 다시 늘어나는 것도 부담이다.

여기에 긴축의 속도를 줄일 기색이 없는 미국의 움직임에 달러화는 나 홀로 질주 중이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지표인 달러인덱스(1973년=100)가 110선을 웃도는 등 달러 강세는 이어지고 있다.

수퍼 달러의 영향은 일파만파다. 원화뿐 아니라 아시아 주요국 통화 모두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24년 만에 달러당 140엔까지 밀렸던 일본 엔화 가치는 이날 오후 4시50분 기준 달러당 144.07엔까지 하락했다. 위안화는 달러당 7위안이 깨지는 ‘포치(破七)’를 목전에 두고 있다. 중국증권망에 따르면 역외시장에서 위안화 가치는 달러당 6.9946위안에 거래됐다.

“반도체 악재, 원화가치 더 많이 끌어내려”

백석현 신한은행 연구원은 “미국 달러는 미국 채권 금리 상승과 동조화(커플링)를 이루며 오름세를 이어갔다”며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의 금리 인상 지속 발언으로 미국의 금리 상승과 달러 강세가 이어질 가능성이 큰 만큼 원화 약세는 한동안 지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낙폭이다. 주요국 통화가 모두 힘을 잃고 있지만, 최근 2주간 원화 약세가 두드러져서다. 이날 한국은행도 “최근 원화의 약세 속도가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에 비해 빠른 측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백 연구원은 “지난주 엔비디아의 반도체 중국 수출 제한 등 반도체 시장의 악재가 원화가치를 더 많이 끌어내린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심리적 저지선인 ‘1달러=1400원’도 곧 무너질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김승혁 NH선물 연구원은 “최근 원화가치가 5원, 10원은 가볍게 떨어지고 있는 만큼 ‘1달러=1400원’은 이달 안에 충분히 올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원화가치 하락을 막을 방법은 딱히 없는 상황이다. 정부 관계자의 잇따른 구두개입도 하락 폭을 소폭 되돌리는 데 그쳤을 뿐 원화값 방어에는 사실상 무소용이다. 추경호 부총리는 이날 방송기자클럽 초청토론회에서 “시장의 쏠림 현상을 예의 주시하고 필요하면 안정 조처를 하겠다”고 밝혔지만, 원화가치 하락을 막지는 못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배당금 송금 등으로 경상수지가 일시적으로 적자를 기록한 적은 간혹 있지만, 상품수지 적자로 8월 경상수지가 적자를 기록한다면 이는 2012년 초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며 “강달러 등 원화 약세에 미치는 외부 요인뿐 아니라 경상수지 적자 위험 등도 원화 추가 약세 요인으로 대두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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