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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값 10% 떨어지면 수입액 3.6% 느는데 수출 증가 0.03%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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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지난 22일 부산항에서 수출 화물을 가득 싣고 컨테이너선이 출항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2일 부산항에서 수출 화물을 가득 싣고 컨테이너선이 출항하고 있다. [연합뉴스]

원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산업계의 ‘환율 리스크’가 가시화하고 있다. 원자재 수입 비중이 큰 기업들은 수익성 악화가 예상된다. 일부 수출 기업은 수혜가 예상되지만, 글로벌 경기 침체로 예전 같은 ‘환율 특수’는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24일 산업통상자원부와 산업계에 따르면 코로나19 충격에서 막 벗어나기 시작한 항공사들은 다시 경영에 발목이 잡힐까 우려하고 있다. 유류비와 항공기 리스료 등을 달러로 지급해야 해, 그만큼 비용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의 경우 원화가치가 10원 하락(환율 상승)하면 약 350억원, 아시아나항공은 약 284억원의 장부상 손실이 발생한다. 여기에 비싸진 달러값이 겨우 살아난 해외여행 수요를 다시 위축시킬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철강업계도 울상이다. 내수 소비는 그대로인데, 환율 상승으로 철광석 등 원재료 구매 가격이 오르면서 원가 부담이 커진다. 업계에서는 수출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포스코·현대제철 등 대형 철강사를 빼면 원화 약세로 피해를 볼 기업이 많은 것으로 본다.

석유화학도 수익성 악화가 우려된다. 국제 유가 상승세는 잦아들었지만, 석유화학제품의 기초 원료로 쓰이는 나프타의 수입 가격이 오른 게 부담이다. 롯데케미칼이 2분기 영업손실 214억원을 기록하며 적자 전환하는 등 국내 대형 석유화학사의 실적도 악화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배터리 업계도 비상이 걸렸다.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SK온 등 배터리 3사는 북미 지역에 배터리 공장의 신·증설을 추진하고 있는데 원화 급락에 투자 규모가 급증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실제 LG에너지솔루션은 투자 비용 상승을 이유로 미국 애리조나에 1조7000억원을 들여 배터리 공장을 짓기로 한 투자 계획을 재검토하고 있다. 한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매출 증대 효과는 있을 수 있지만, 반대급부로 투자비와 인건비가 증가하는 부분이 있다”며 “환율 변화의 영향을 면밀히 점검하고 있다”고 전했다.

일반적으로 원화가치 하락은 타국 통화로 표시된 한국의 수출품 가격을 내린다는 점에서 수출기업의 가격 경쟁력을 높인다. 하지만 이번 원화가치 하락은 과거처럼 수출기업에 유리하게만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한국 기업들이 그간 해외에서 원자재를 사와 가공해 수출하거나, 중간재를 넘긴 뒤 현지에서 완성품을 생산하는 식으로 수출 방식을 바꿔왔기 때문이다. 결국 가격 경쟁력 강화 효과는 줄고, 원자재 등을 비싸게 사와야 하는 부담이 커진 셈이다.

국제무역통상연구원에 따르면 국제 유가와 원·달러 환율이 10% 상승할 경우 수출단가는 0.04% 오르고, 수출물량은 0.01% 감소해 수출금액은 0.03% 증가에 그친다. 반면 수입금액은 3.6% 증가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연구원은 “(원화 가치 하락은) 무역적자 확대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업종별로 살펴보면 일부 강달러로 웃는 업종이 있긴 하다. 계약금 대부분을 달러로 받는 조선사는 수혜가 예상된다. 처음 주문을 받았을 때와 비교해 달러값이 비싸진 만큼 매출이 늘어나서다. 한국조선해양은 2분기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당초 조선 부문 흑자를 4분기 정도로 예상했는데 환율 상승 등의 영향으로 3분기부터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국 수출, 환율보다 글로벌 경기에 더 영향 … 호재보다 악재 많은 상황”

24일 명동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전광판에 원·달러 환율 종가가 표시돼 있다. [연합뉴스]

24일 명동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전광판에 원·달러 환율 종가가 표시돼 있다. [연합뉴스]

달러 강세는 수출과 판매 대금의 달러 비중이 높은 완성차 업계에도 호재다. 현대차와 기아차의 환율 상승에 따른 2분기 영업이익 증대분은 각각 6410억원과 5090억원에 달했다. 서강현 현대차 기획재경본부장(부사장)은 2분기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판매 믹스 개선 및 인센티브 축소, 우호적인 환율 환경 등의 영향으로 매출과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모두 큰 폭으로 증가했다”고 말했다.

외화 곳간이 넉넉한 전자업종도 강달러 수혜 업종으로 분류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올해 2분기 환차익으로 각각 1조3000억원·4000억원 이상의 영업이익 증가 효과를 봤다. LG전자도 2분기 ‘외화표시 현금의 환율변동 효과’가 1341억원으로, 1분기(474억원)보다 3배 가까이 늘었다고 밝혔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의 수출 경쟁국들의 통화가치도 함께 떨어졌기 때문에 예전 같은 수출의 환율 효과는 기대하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양 교수는 이어 “이제 한국의 수출은 환율보다 글로벌 경기 흐름에 더 영향을 받는다”며 “주요국의 소비 심리가 위축된 데다, 글로벌 공급망 위기도 여전해 한국의 수출은 호재보다 악재가 더 많은 상황”이라고 짚었다.

전방위적인 수출입 악재가 이어지면서 정부는 무역수지 개선과 수출 확대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날 안덕근 통상교섭본부장 주재로 수출지원기관, 12개 업종별 협회 등이 참석한 수출상황 점검회의를 열었다. 8월 1~20일에만 102억2000만 달러의 적자를 내면서 5개월 연속 무역수지 ‘마이너스’가 거의 확실시된다. 올해 누적 무역적자도 254억7000만 달러까지 쌓이면서 1996년(206억 달러)을 넘어 역대 최대치를 찍었다.

회의에 참석한 각 협회는 투자 인센티브(반도체), 무역금융(조선), 신시장 진출(바이오) 등 업종별 맞춤형 지원을 해달라고 정부 측에 건의했다.

정부는 하반기 수출을 끌어올리기 위해 단기적으로는 무역금융과 물류, 해외마케팅 등의 지원에 나선다. 중장기적으로는 주력 산업 고도화, 수출 유망산업 육성, 공급망 안정화 등을 추진한다. 안 본부장은 “이달 말 산업 경쟁력 강화, 에너지 수입 수요 안정 등을 담은 종합적인 수출경쟁력 강화 전략을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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