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킹] 멍하니 쉬고 싶을 날, 아메리카노가 어울리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2022.07.29 08:30

정동욱의〈커피 일상〉
커피는 참 이상합니다. 필수영양소가 들어 있는 것도 아니고 허기를 채워주는 것도 아닌데 왜들 그렇게 마시는 걸까요. 생존을 목적으로 진화한 인간에게 쓴맛은 독, 신맛은 부패한 음식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단맛을 넘어 신맛과 쓴맛까지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죠. 커피가 바로 그렇습니다. 바리스타 정동욱의 ‘커피 일상’에서는 오랜 시간 각인된 본성마저 거스르며 이 검은 액체를 거리낌 없이 사랑하게 된 이유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아메리카노에 사용하기 위한 에스프레스를 추출하고 있다. 사진 김다정

아메리카노에 사용하기 위한 에스프레스를 추출하고 있다. 사진 김다정

저울 위, 샷 글라스에 담긴 에스프레소를 쳐다본다. 21초 동안 28.2g 추출한 짙은 갈색의 에스프레소다. 이 에스프레소 샷이 아메리카노에 사용하기 적당한지 생각 중이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추출 시간이다. 근래 더워진 날씨를 고려하면 21초는 빠르다. 날씨가 더워지면 물은 점성이 약해져 물 같은 물이 되어버린다. 묽은 물은 커피의 향미를 충분히 끌어내지 못하고 날카로운 커피를 만든다.

이럴 땐 추출 시간을 더 길게 가져가는 게 유리하다. 커피에 압력을 가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보다 농밀한 에스프레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추출 시간이 너무 길어도 곤란하다. 특정 시점을 넘어서 추출한 에스프레소는 다시 묽고 자극적인 맛이 된다. 결국 ‘적절함의 기준’은 날씨와 같은 환경 변수에 의해 달라진다. 항상 똑같은 레시피로 추출하면 늘 다른 커피를 만들게 되는 이유다. 매일의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커피는 매일 레시피가 달라진다. 매일의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진 김다정

커피는 매일 레시피가 달라진다. 매일의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진 김다정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보통 핸드드립 커피인 ‘오늘의 커피’나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던 단골손님 수미 작가가 오늘은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커피의 양을 0.3g 늘려 21.2g을 포터 필터에 담는다. 목표는 24초 내외에 27g에서 27.8g 사이를 추출하는 것이다. 진득한 에스프레소가 또르르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커피가 맛있어지는 소리다. 추출되는 에스프레소의 색 변화나 점성의 변화 모두 양호하다. 24초 28g. 이만하면 적당하다.

샷 글라스에 담긴 에스프레소를 머그잔에 붓는다. 그다음 85도로 데워진 전기 포트의 물을 머그잔에 부어 준다. 촘촘하게 모여있던 커피의 입자들이 물속에서 흩어진다. 커피를 희석하는 물은 어떤 의미로는 ‘공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28g(에스프레소)에 190g(희석하는 물)의 공간이 더해지면, 커피의 밀도(농도)는 현저히 낮아진다. 아메리카노는 밀도가 낮은 커피다. 그래서일까, 비어 있는 공간에서 휴식을 느끼는 것처럼 편안함을 주는 커피다.

“무슨 생각 하세요?” 아메리카노를 내어드리며 손님에게 말을 건넨다. “저건 길쭉하게 생겼구나, 저건 또 저렇게 생겼구나, 하고 있어요. 멍 때리는 거죠. 오늘은 좀 멍하게 있고 싶네요.” 창밖 벤치에 앉아 있던 손님이 말한다. 텅 빈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던 손님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삼키더니 이렇게 말한다. “카페라는 공간만큼 멍 때리기 좋은 곳도 없죠. 집과 직장을 넘어 제3의 공간이 필요한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아메리카노는 핸드드립 커피보다 맛이 풍부하고 부드럽다. 사진 김다정

아메리카노는 핸드드립 커피보다 맛이 풍부하고 부드럽다. 사진 김다정

“딱이에요. 부드럽고 달콤해서 편안해요.” 아무래도 필터 커피만 드시던 손님이라 맛이 어떤지 조심스레 여쭤보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에스프레소 추출이란 결국 압력에 의해 커피를 ‘짜내는 것’이다 보니, 과장해서 말하면 이때 액체의 점성은 기름과 흡사하다. 반대로 종이필터에 걸러낸 핸드드립 커피는 투명하고 맑다. 그런가 하면 에스프레소를 물로 희석한 아메리카노는 핸드드립 커피보다 다소 텁텁할 순 있지만 풍부하고 부드러운 맛을 가진다. 특히 다크 로스팅 커피로 만든 아메리카노는 달콤하고 포근하다.

“커피의 향미가 화려할 때는 커피 자체를 생각하게 되죠. 그런데 다크 로스팅 아메리카노는 도리어 생각을 비우게 만들어 줍니다. ‘무위(無爲)’의 시간이랄까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짧은 설명만 보태고 자리를 뜬다. 손님이 혼자만의 시간을 원한다는 걸 느끼기 때문이다. 바리스타의 일은 커피를 만드는 게 전부가 아니다. 말을 건네야 할 때와 아닌 순간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아메리카노는 차가운 물 사이로 진득한 에스프레소를 부어 만든다. 사진 김다정

아메리카노는 차가운 물 사이로 진득한 에스프레소를 부어 만든다. 사진 김다정

자리로 돌아와 다시 커피를 만든다. 이번엔 아이스 아메리카노다. 잠깐 사이 에어컨 바람이 그라인더의 날을 식혀버렸기 때문에, 아까보다 곱게 커피를 갈아낸다. 커피양은 줄여 담는다. 진득하게 떨어지는 에스프레소를 보며 유리컵에 얼음을 담는다. 얼음이 담긴 유리컵에 물 150g을 담고 막 추출한 에스프레소를 붓는다. 차가운 물 사이로 물감처럼 번져나가는 에스프레소를 잠시 바라보다 뚜껑을 닫고 빨대를 꽂는다.

“어휴. 안 되겠다” 카페를 찾은 과일가게 사장님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생수처럼 벌컥벌컥 들이키곤 “한 잔 더” 주문한다. 바쁜 현대인에게 각성과 갈증을 한꺼번에 해결해 주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또 다른 의미의 ‘생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또 드시냐는 질문에 스마트폰 게임을 하던 사장님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한다. “이번 건 천천히 마시려고.” 하지만 두 번째 커피도 금세 사라지고, 사장님은 빈 플라스틱 컵에 물을 담고 나갈 채비를 한다. “저 갑니다!” 네. 오늘도 파이팅입니다!

DRINK TIP 아메리카노를 즐기는 방법  
아메리카노는 하나의 형식입니다. 그 형식 안에는 다양한 내용이 들어갈 수 있죠. 그러니 어떤 커피(내용)를 사용하는지 확인해 보세요. 다크 로스팅 블렌딩 커피부터 라이트 로스팅 싱글 오리진까지, 생각보다 아메리카노는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커피랍니다. 요즘에는 아메리카노에 들어갈 원두를 선택할 수 있는 매장도 꽤 있으니, 주문할 때 원두를 고를 수 있는지 물어보세요. 바리스타의 설명을 들은 후, 익숙하지 않은 느낌의 커피를 선택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낯선 향미의 커피가 어쩌면 새로운 일상으로 우리를 이끌어 줄지도 모르니까요.

정동욱 커피플레이스 대표 cook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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