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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 차이, 맛이 진득해졌다…'직원용 라떼'가 메뉴판 오른 사연 [쿠킹]

중앙일보

입력

정동욱의〈커피 일상〉
커피는 참 이상합니다. 필수영양소가 들어 있는 것도 아니고 허기를 채워주는 것도 아닌데 왜들 그렇게 마시는 걸까요. 생존을 목적으로 진화한 인간에게 쓴맛은 독, 신맛은 부패한 음식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단맛을 넘어 신맛과 쓴맛까지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죠. 커피가 바로 그렇습니다. 바리스타 정동욱의 ‘커피 일상’에서는 오랜 시간 각인된 본성마저 거스르며 이 검은 액체를 거리낌 없이 사랑하게 된 이유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입속에서 에스프레소와 우유가 섞이며 새로운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직원용 라떼'. 사진 정동욱

입속에서 에스프레소와 우유가 섞이며 새로운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직원용 라떼'. 사진 정동욱


“이거 주문할 수 있는 건가요?”

손님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메뉴의 이름은 ‘직원용 라떼’입니다. ‘직원용’이라고 쓰여 있으니 주문할 수 있나 없나, 잠시 고민하셨던 모양입니다.

“직원들이 먹던 방식으로 만든 라떼입니다. 주문하실 수 있습니다.”

손님이 ‘직원용 라떼’를 주문할 때는 보통 이런 상황이 펼쳐지곤 합니다. 손님은 시킬 수 있는 메뉴인지 물어보고, 저희는 커피 이름이 왜 ‘직원용 라떼’인지, 이 커피는 어떻게 즐겨야 더 맛있는지 설명하는 상황이죠. 여러분도 궁금하시지 않나요? 그래서 이번에는 ‘직원용 라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더 진하게는 안 되나요?” 세 번째 커피를 주문하던 한 손님이 이렇게 말했죠. 라떼를 진하게 요청하신 손님은 커피의 농도가 마음에 안 드셨던 모양입니다. “저렇게 만들어 주시면 안 되나요?” 손님은 커피 바 뒤에서 조그만 잔에 라떼를 만들어 먹던 저희 직원 지영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찬 우유를 작은 피카디 잔에 담고, 포터필터에 원두를 담는다. 사진 정동욱

찬 우유를 작은 피카디 잔에 담고, 포터필터에 원두를 담는다. 사진 정동욱

우리는 잠시 서로를 쳐다본 뒤 곧장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작은 피카디 잔에 찬 우유를 얼음 없이 120g 정도 담습니다. 그리고 포터필터(Porter Filter)에 원두를 담습니다. 커피머신에 장착하는, 손잡이가 달린 동그란 통처럼 생긴 필터죠. 이때 커피는, 라떼를 만들 때보다 0.2g 줄인 커피 20.9g으로 담습니다. 우유의 양이 적다 보니 약간 빠른 추출이 더 조화롭기 때문이죠. 그래 봤자 1초 정도의 차이지만, 맛에서는 분명한 차이가 느껴집니다.

커피 추출에서 1초의 차이는 생각보다 큰 맛의 차이를 가져옵니다. 예를 들어, 추출이 21초에서 23초 사이가 괜찮다고 봤을 때, 20초로 추출한 라떼는 맛과 향이 날카롭고 씁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달고 진득한 맛이어야 하는데, 묽고 날카롭게 느껴지는 거죠.

커피를 추출할 때 1초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큰 맛의 차이를 가져온다. 사진 정동욱

커피를 추출할 때 1초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큰 맛의 차이를 가져온다. 사진 정동욱

에스프레소 머신 트레이에 저울을 올리고 그 위에 우유가 든 피카디 잔을 올려 영점을 잡고 추출 버튼을 눌러줍니다. 포터필터 아래로 떨어지는 진득하고 반짝이는 마호가니 빛 에스프레소를 관찰합니다. 커피가 전체적으로 고르게 추출되는지 확인하는 것이죠. 만약 한쪽으로 치우쳐 추출된다면 소위 채널링(Channeling)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포터필터에 커피를 담을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하죠.

채널링이 뭔지 궁금하시다고요? 자, 커피 층을 통과하는 물의 여정을 상상해 보시죠. 곱게 분쇄해 포터필터 안에 강하게 다져진 커피 층을 뚫고 나아가야 하는 물의 여정입니다. 힘겹게 커피 층의 저항을 이겨내던 물이, 커피가 약하게 다져진 부분을 발견한다면 어떨까요. 물은 당연히 그쪽으로 돌진하게 됩니다. 바로 채널링입니다.

“물은 게으르다.” 라떼아트의 창시자이자 미국 시애틀의 로스터리 카페 ’에스프레소 비바체‘의 CEO인 데이비드 쇼머의 책 『에스프레소』에 나오는 말입니다. 채널링이 발생한 곳에서는 과다한 추출이 일어나고, 채널링이 발생하지 않은 곳에서는 과소추출이 일어납니다. 역시 맛이 묽고 쓰게 느껴지며 기대하는 향미가 잘 발현되지 않습니다.

“이 맛이에요! 저 앞으로 이렇게 주시면 안 돼요? 이 커피를 뭐라고 부르면 되나요? 직원용 라떼?” 이후로도 이 손님은 직원용 라떼를 찾으셨고,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메뉴판에 ’직원용 라떼‘를 정식으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정식 메뉴가 된 후, 직원용 라떼를 손님에게 내어드릴 때는 반드시 이렇게 질문하곤 합니다. “드셔보신 적 있으신가요?”

'시그니처' 메뉴는 커피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환경,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완성된다. 사진 정동욱

'시그니처' 메뉴는 커피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환경,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완성된다. 사진 정동욱

그다음으로는 직원용 라떼를 어떻게 먹어야 가장 맛있는지 설명해드리죠. “차가운 우유 위에 에스프레소가 올려져 있습니다. 커피를 드시면 먼저 진한 에스프레소가 입안으로 들어옵니다. 그 뒤로 차가운 우유가 따라 들어와 입속에서 에스프레소가 라떼로 변해가는 과정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섞이기 전에 드시고, 차가운 우유가 넘어올 때까지 컵을 충분히 기울여 보세요.”

입속에서, 에스프레소가 라떼로 변해가는 그 과정은 꽤 특별한 경험이 되기도 합니다. 에스프레소가 더는 에스프레소가 아니게 되는 순간이죠. 에스프레소가 라떼로 변해가는 그 경계를 입속에서 느낄 수 있는 아주 흥미로운 경험입니다. 이게 뭐 그리 특별하냐고 되물으실 수도 있겠네요. 사람들은 새로운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에스프레소를 ’숏 블랙‘이라 부르는 호주에서는 라떼를 ’플랫 화이트‘라 부르죠. 새로운 이름은 새로운 개념을 인식하게 하고, 새로운 개념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듭니다. 우리는 이야기가 있는 대상을 더 입체적으로 인식하죠.

“여기 시그니처가 뭐예요?” 근래 자주 듣는 질문입니다. 시그니처(signature), ‘서명’이란 뜻의 이 단어를 저는 ‘이야기’로 해석합니다. ‘그 커피집만의 이야기가 있는 메뉴’로 말입니다. 그러니 ‘시그니처 메뉴’를 찾는 손님의 말은, 다시 말하면 이 집만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뜻 아닐까요? 시그니처가 이야기라면, 시그니처는 메뉴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커피를 만드는 방식이나 도구, 혹은 커피를 만드는 사람, 즉 바리스타에게서도 시그니처는 있습니다. 바리스타가 해석한 커피에 관한 이야기라든지, 바리스타의 복장이나 커피를 만들 때 보이는 제스처 같은 것들이죠.

카페를 찾은 사람들은 커피만 소비하지 않습니다. 커피가 만들어지는 과정 혹은 그 환경에 담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함께 소비하죠. 그렇다고 어떤 이야기라도 다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급조한 이야기는 쉽게 잊힐 수밖에 없죠. 맛있는 커피를 만들기 위한 과정 정도는 있어야, 비로소 ‘이야기’가 완성됩니다.

시간이 있을 때면, 평소 다 전하지 못한 ‘직원용 라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기도 드립니다. “우유에 들어간 얼음이 녹으면 묽어집니다. 우유를 스티밍하면 성분이 변하죠. 저는 개인적으로 우유는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라떼 역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직원용 라떼에 가공되지 않은 우유가 들어가는 이유입니다. 자, 직원용 라떼가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시길 바랍니다.”

DRINK TIP 시그니처 메뉴를 즐기는 법
요즘은 매장마다 한두 가지의 시그니처 메뉴를 두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바리스타에게 메뉴에 관한 설명을 부탁해 보세요. 재밌는 이야기를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메뉴판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도 좋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숨겨져 있습니다. 가령 메뉴판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있는 메뉴는 그곳에서 주력으로 선보이고 싶은 메뉴일 확률이 높습니다. 자신들이 어떻게 기억되고 정의되고 싶은가에 관한 답이 그곳에 있죠. 설령 그 위치에 해당하는 메뉴가 평범한 아메리카노라고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아메리카노가 그 집의 시그니처일 수도 있으니까요. 특별한 메뉴도 좋지만 결국 그 커피집이 추구하는 방향성에 관한 이야기가 시그니처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정동욱 커피플레이스 대표 cook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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