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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때가 되었다:이제 한국전쟁 박물관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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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7월27일은 한국전쟁 정전일이다. 오늘 워싱턴에서는 뜻깊은 한국전 전사자 ‘추모의 벽’ 준공식이 열린다. 지난해 두어 차례 공사 현장에 들러 미국 정부 및 작업 관계자들과 나누었던 대화가 아직 선명하다. 특히 전사자 명부 모형을 미리 보며 느낀 감사와 감동의 마음은 사진처럼 또렷하다.

인간은 개인이건 나라건 위기극복을 지나, 받은 도움을 갚을 수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되면 그 기쁨과 자부는 말할 수 없이 크다. 갚을 능력과 마음을 갖게 되는 존재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2023년 한국전쟁 정전 70주년을 앞두고 오래된 생각 하나를 나누고 싶다. 그것은 정전 70주년을 맞아 워싱턴 한국전쟁 기념공원과 추모의 벽 주위에 ‘한국전쟁 박물관’(Korean War Memorial Museum)을 착공하자는 제안이다.

2023년 한국전쟁 정전 70주년
워싱턴 한국전쟁박물관 착공을
비극과 회복, 번영과 융성을 공유
온 인류와 성찰·책임·희망을 함께

주지하듯 한국전쟁은 오늘의 한국과 세계를 있게 한 결정적 사건이었다. 참전국가의 숫자와 규모, 그리고 세계에 끼친 영향의 크기에서 한국전쟁은 1차 세계대전 이상이다. 당시 독립국가들 중 병력·의료·물자를 통해 무려 70% 이상 국가가 참여한 세계전쟁이었다. 개별국가전쟁으로는 세계에서 유일하였다. 이 전쟁이 놓은 동아시아와 세계 질서의 지속성을 고려할 때 훗날 이 전쟁은 인류사의 ‘30년 전쟁’과 ‘1차 대전’에 비견될 것이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인류의 서구는 대항해시대·르네상스·과학혁명·근대(와 식민)의 문을 연 바 있다. 500년 후 1953년 한반도의 세계휴전으로 인류는 ‘다시’ 세계·동서·문명·이념의 균형추를 놓은 바 있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사회주의 진영’이 베를린 장벽에서 휴전선까지 였음을 유념할 때 전자가 붕괴된 오늘날 휴전선은 문명사적 위상을 갖는다. 지금 대륙과 해양, 미국과 중국, 동과 서, 자유주의와 비자유주의 진영은 다시 건곤일척 기세를 겨루고 있다. 한반도는 그 절대경계다.

한국전쟁은 21세기의 두 제국 미국과 중국이 정면 대결한 최초 전쟁일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둘이 직접 충돌한 유일한 전쟁이다. 미국이 대서양·태평양·인도양을 모두 관장하는 세계제국으로 부상한 것은 이 전쟁 때문이었고, 중국이 미국에 맞서 소련을 제친 계기도 이 전쟁이 시발이었다. 중국 고립과 부상의 결정적 계기였다.

미중 경쟁시대를 맞아 두 제국의 역사전쟁과 현재 관계의 가장 깊은 출발점은 정확히 한국전쟁이다. 중국의 한국전쟁에 대한 사실 왜곡, 참전 정당성 홍보, 항미원조전쟁과 승전 담론은 시진핑 주석을 필두로 중국공산당·베이징·언론·예술에 걸쳐 계속 쏟아지고 있다. 미국은 2013년 오마바 대통령의 선언 이래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을 완전 전환하여 ‘잊힌 전쟁’이 아니라 ‘승리한 전쟁’ ‘잊힌 승전’으로 언명한다. 트럼프-바이든 시대의 한국전쟁 기억은 더더욱 그러하다. 지난해 방문 시 미국 국방성의 가장 중요한 전시내용은 한국전쟁의 기록들이었다.

미국과 자유진영으로서는 전후 최초·최대로 승리한 전쟁이 바로 한국전쟁이었던 것이다. 한국에 관한 한 한국전쟁은 가장 혹독한 역설의 상징이다. 그것은 절대 파괴에서 최고 번영을, 어둠에서 빛을, 무에서 유를 창조한 전환과 재생의 출발점인 동시에, 세계연대를 밑받침해준 희생과 헌신의 주춧돌이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에 대한 한국과 세계의 미래 기억은 생명·자유·인권·민주주의·평화·공존·화해로 자리매김돼야 한다. 그 근본 가치들을 위해, 2차대전 기억을 상징하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넘어, 그 이후의 인류비극과 회복을 증언하고, 책임과 소명을 다짐해야 한다. 당시에 세계는 한국을 구했고, 한국은 세계를 구했던 것이다.

워싱턴 한국전쟁 박물관을 통해 전쟁의 기원과 결정, 발발과 전개, 참상과 학살, 결과와 영향에 대한, 한반도와 온 세계의 각종 사실과 진실들은 남김없이 전시되어야 할 것이다. 이 땅과 세계의 주요 지도자들 및 전략들도 두루 들어간다. 이승만, 김일성, 트루만, 처칠, 맥아더, 스탈린, 마오쩌둥… 한국의 빛나는 전후 복구와 번영, 민주주의와 문명 발전의 궤적도 물론이다.

이 전쟁에 앞서 한반도에서 한국인들이 겪었던 대전쟁들, 그들 사이의 초장기 평화의 모습과 요인들, 노력과 지혜도 함께 전시하자. 그 시대 정치와 외교는 물론 높은 문화와 사상도 포함될 것이다. 광개토대왕·을지문덕·강감찬·세종대왕·이순신·안중근의 활동과 성취, 기록과 고뇌도 보여주자.

그리하여 그 박물관은 우리와 세계, 그리고 우리와 세계의 후손들의 가장 큰 자부와 가장 깊은 성찰의 장소가 될 것이다. 다시는 이 땅과 세계에 전쟁의 몽매를 반복하지 말자고 한국인들과 세계인들이 함께 다짐하며, 동시에 어떠한 파괴와 비극에도 인간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자.

한반도는 오랫동안 문명과 문화의 충돌·절충·융섭·융합·접변·통합·융성의 장소였다. 한국전쟁 박물관을 통해 그 넓은 문을 세계에 열고 보여주자. 홀로코스트 박물관 곁에서, 또 그를 넘어, 이제 한국전쟁 박물관을 보며 세계인들이 인류의 과거 교훈과 미래 가치를 함께 온 누리에 펼치는 다짐을 가슴에 새기도록 해보자.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