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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에 밥, 한끼만 먹는다" 고물가마저 덮친 쪽방촌 3중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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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14일 정오쯤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 인근의 한 공원. 이 동네에 사는 전태림(56)씨의 회색 티셔츠는 목 둘레부터 허리께까지 땀에 절어 있었다. 그는 오전 6시에 고물상에서 임대한 리어카를 끌고 동자동 쪽방에서 나와 폐지와 고물을 주웠다고 했다. 정오가 되면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자 전씨는 잠시 나무 그늘에 숨었다.

전씨는 “더위보다 장마가 더 싫다”고 말했다. 비가 내리면 전씨의 하루 수입은 0원이 된다. 우비를 쓰고 리어카를 끌어도 봤지만, 고물상에선 젖은 폐지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비가 잦았던 지난 일주일 내내 일을 못 했다”며 “그냥 하늘을 보고 기도를 할 뿐”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장맛비와 함께 후텁지근한 날씨가 계속된 지난 6월 29일 서울 종로구 돈의동 일대 쪽방촌 골목에서 이 지역에 58년간 살아온 한 어르신이 방 안의 더위를 피해 골목에 의자를 놓고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장맛비와 함께 후텁지근한 날씨가 계속된 지난 6월 29일 서울 종로구 돈의동 일대 쪽방촌 골목에서 이 지역에 58년간 살아온 한 어르신이 방 안의 더위를 피해 골목에 의자를 놓고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장마엔 수입 ‘0원’…“아무리 더워도 일해야”

장마 기간 돈을 벌지 못했기 때문에 전씨는 폭염 속에서도 리어카를 끌어야 했다. 그는 평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6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지만 한낮 벌이가 시원치 않으면 밤새 고물을 찾으러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전씨가 손에 쥐는 돈은 하루 평균 2만원이다.“요즘엔 취미로 종이박스 줍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더라”고 걱정하던 전씨는 이내 모아놓은 박스를 얹고 나무그늘을 나섰다.“그래도 나는 ‘깡’이 있어서 괜찮다”며 미소를 남겼다.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 사는 전태림(56)씨가 14일 오전 6시부터 오전 11시까지 모은 폐지와 고물이 리어카에 실려 있다. 전씨는 이를 모두 모아도 1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날은 한 가게에서 폐정수기를 줘서 3000원을 더 벌 수 있었다. 최서인 기자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 사는 전태림(56)씨가 14일 오전 6시부터 오전 11시까지 모은 폐지와 고물이 리어카에 실려 있다. 전씨는 이를 모두 모아도 1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날은 한 가게에서 폐정수기를 줘서 3000원을 더 벌 수 있었다. 최서인 기자

11시간 이상 이어지는 일을 마치고 나면 전씨는 동네 수돗가에서 찬물로 더위를 식힌다고 한다. 온수는 나오지 않는다. 온수가 필요하면 밥솥으로 물을 데웠고, 집 바로 앞에 있는 수돗가로 가서 냉수와 섞어 쓴다. 집에 에어컨은 물론 세면대도 없어서다. 그는 “선풍기 틀고 잠을 청하긴 하지만 집이 낡아서인지 밖에서 자는 것만도 못하다. 더워서 도무지 잠이 안 온다”고 말했다.

전씨는 한 달에 고물 수집으로 약 50만원을 번다. 전씨의 한달 수입 사용처를 그래픽으로 나타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전씨는 한 달에 고물 수집으로 약 50만원을 번다. 전씨의 한달 수입 사용처를 그래픽으로 나타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폭염ㆍ폭우보다 무서운 ‘고물가’

요즘 폭염이나 폭우보다 전씨를 더 두렵게 하는 건 고물가다. 개인 사정으로 수급자가 되지 못한 그는 폐지 일을 통해 버는 매달 50여만원이 수입의 전부다. 그는 “물가가 너무 세니까 사발면에 밥 말아서 김치랑 되는 대로 먹는다”며 “가장 저렴하게 파는 쌀을 사곤 했는데 그마저도 값이 너무 올랐다”고 말했다. 전씨의 한 달 식비는 최대 15만원. 김치 등 반찬을 살 때마다 1만원 정도를 쓴다. 그는 “김치 1만원어치는 양이 주먹만 하다. 이틀이면 다 먹어버린다”고 했다.

한 달 식비 10만원인데…장 한 번 보면 끝나 

김모(65)씨가 서울 종로구 돈의동의 방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다. 김씨는 매월 기초수급비 87만원을 받아 생활하는데 30만원을 월세로 지불한다. 최서인 기자

김모(65)씨가 서울 종로구 돈의동의 방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다. 김씨는 매월 기초수급비 87만원을 받아 생활하는데 30만원을 월세로 지불한다. 최서인 기자

14일 오후 찾은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 폭 1m가 채 안 되는 5개 골목마다 철제 출입문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익선동으로부터 채 100m도 떨어지지 않은 이곳엔 84동에 730여개의 쪽방이 들어차 있다. 이곳에서 만난 주민들의 사정도 전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쪽방촌 주민 대다수는 매월 20일 기초생활 수급을 받아 생활하고, 10만원 안팎을 한 달 식비로 쓴다고 했다. 돈의동 쪽방촌에 사는 황영석(62)씨는 “요즘 하루에 세 끼를 다 먹어서는 10만원에 맞출 수 없고, 늦은 점심 한 끼만 먹는다. 만약 배고프면 저녁 10시쯤 라면 반 개 끓여 먹는다”고 했다.

쪽방촌 주민들은 자고 일어나면 오르는 물가가 그 어느 때보다 피부에 와 닿는다고 입을 모았다. 돈의동 쪽방촌의 최인섭(64)씨는 “3800원 하던 편의점 도시락이 이제는 4800원이다. 일주일에 한 번은 짜장면이라도 먹고 싶은데 그마저도 이젠 7000원씩 하니 먹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동자동 쪽방촌 주민 김모(61)씨는 “이전에는 돈 1만원으로 부식이라도 조금 사 먹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알뜰하게 써도 2~3가지를 사면 1만원이 나간다. 1000원 하던 상춧값이 4000원이 되고 편의점 도시락도 비싸서 못 사 먹는다”며 “한 달 7만원 정도로 식비를 잡았는데 이젠 15만원은 든다”고 했다.

김모씨의 방 출입문 옆 벽면에는 조리도구가 걸려 있다. 조리사로 일했던 김씨는 시장에서 직접 장을 봐서 반찬 만들기를 좋아했는데, 최근 물가가 오르면서 시장에는 가지 않게 됐다. 최서인 기자

김모씨의 방 출입문 옆 벽면에는 조리도구가 걸려 있다. 조리사로 일했던 김씨는 시장에서 직접 장을 봐서 반찬 만들기를 좋아했는데, 최근 물가가 오르면서 시장에는 가지 않게 됐다. 최서인 기자

돈의동에 거주하는 김모(65)씨는 시장에 간 지 한 달이 넘었다고 했다. 올해 초만 해도 그는 일주일에 1번은 인근 경동시장에 가서 장을 봤다. 아끼고 아끼면 좋아하는 한라봉도 사고, 배추를 사 겉절이를 해 먹을 수도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시장에 갔을 때 애호박이 1개에 2500원, 깐대파가 4000원 하더라. 돈이 없으니 식비를 거의 안 쓰다시피 한다”며 “마가린과 고추장에 밥을 비벼 먹는 등 내 입맛에 맞게 식비를 줄이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전기료·가스비도 올라…월세마저 오를까 걱정

장바구니 물가가 폭등한 사이 전기료와 가스비마저 오른 건 쪽방촌 사람들의 숨통을 죄고 있다.쪽방촌 월세에는 전기료와 가스비가 포함돼 있어 공과금 증액은 곧바로 월세 상승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1일부로 일반 국민과 자영업자 등이 사용하는 민수용(주택용·일반용) 도시가스 요금을 평균 7.3%(서울시 소매 요금 기준·VAT 별도)올렸고, 전기료는 1킬로와트시(kWh)당 5원 인상했다. 가스료와 전기료는 10월 추가인상이 예고돼 있다.

박모(70)씨는 “28만원이었던 월세가 지난해 6월 30만원이 됐다가 지난 6월에 또 2만원이 올라 지금은 32만원이 됐다”며 “매년 여름마다 월세를 올리는 집주인들이 야속하기만 하지만 결국 못 견디는 사람이 나가야 하는 거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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