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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테러가 극우 힘 키운다? 尹 '한·일 관계' 구상 영향 받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윤석열 정부가 일본의 참의원 선거 후로 미뤄뒀던 한ㆍ일 관계 개선 구상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 사망의 여파로 시작하기도 전에 추동력을 잃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다만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조만간 '아베의 그림자'를 털어내고 자기 색깔을 내기 시작할 경우 양국 관계에 반전의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온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8일 오전 일본 나라현 나라시 소재 야마토사이다이지역 인근 노상에서 총격을 받고 쓰러진 모습. 연합뉴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8일 오전 일본 나라현 나라시 소재 야마토사이다이지역 인근 노상에서 총격을 받고 쓰러진 모습. 연합뉴스.

'동정표'까지 모아 압승 유력

10일 실시된 참의원 선거에선 아베 전 총리에 대한 동정표가 몰리고 보수가 결집하면서 자민당의 압승이 확실시된다.

이에 따라 방위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2%로 증액하며, 반격 능력(적 기지 공격 능력)을 보유하는 등 군사력 증강을 골자로 한 자민당의 선거 공약 실현도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고위급 인사를 겨냥한 테러 자체가 일본 내 대외적 강경 여론에 힘을 싣는 요소라는 분석이 나온다.

평화헌법을 개정해 자위대(일본 군대) 보유를 명문화하는 개헌 작업에 속도가 붙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아베 전 총리가 스스로 ‘필생의 업’이라고 밝힌 만큼 그의 유지를 받드는 의미도 있다. 개헌안을 발의하려면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각각 의석 3분의 2 이상을 얻어야 하는데 현재 중의원에선 이미 필요 의석 수를 확보한 상태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번 피습 사건은 일본에서 치안에 대한 국민적 우려와 함께 보수 세력의 결집으로 이어지고, 결국 그들이 외교안보 분야에서 주장해온 군사력과 안보 강화 요구로 이어질 수 있다"며 "결국 '스스로 지킬 힘이 필요하다'고 강조해 왔던 일본 극우 세력의 목소리가 커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에게 총을 쏴 숨지게 한 야마가미 데쓰야가 10일 오전 일본 나라 서부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는 모습. 연합뉴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에게 총을 쏴 숨지게 한 야마가미 데쓰야가 10일 오전 일본 나라 서부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는 모습. 연합뉴스.

당장 관계 개선은 부담

기시다 내각의 우경화 정책이 탄력을 받는 반면, 과거사 문제 해결 등 한국과 관계 개선 작업은 단기적으로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참의원 선거 승리와 아베 전 총리 피습의 파장이 결합하며 자민당 특유의 보수적 색채가 한층 짙어지고, 한국에 적대적인 분위기가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선거에서 압승하더라도 기시다가 이끈 승리가 아닌 사실상 아베 추모 선거였다는 여론이 커지면 당내 온건파로 분류되는 기시다가 자기 정치를 할 공간은 더욱 좁아진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기시다 총리가 당장 한ㆍ일 관계 개선에 주도적으로 나서기는 어려운 상황이 됐다"며 "자칫 '아베가 사라진 틈을 타 한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이익을 챙기려 한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는 만큼 당분간은 아베의 정책을 비판하거나 뒤집는 결정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경우 일본 참의원 선거를 기점으로 고위급 인사 교류 등 관계 개선의 첫 발을 떼려던 윤석열 정부 구상에도 차질이 불가피하다. 당초 오는 18~21일쯤으로 조율되던 박진 외교부 장관의 첫 방일 일정도 영향을 받게 됐다. 이와 관련, 외교부 고위당국자는 지난 8일 기자들과 만나 "예기치 않은 사건 때문에 앞으로 일본 측과 협의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국내적 혼란 수습, 보수의 구심점을 잃어버린 자민당 내 집안 정리 필요성 때문에 한ㆍ일 관계 자체가 기시다 내각의 우선 순위에서 밀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에게 총을 쏴 숨지게 한 야마가미 데쓰야를 태운 차량이 10일 오전 일본 나라 서부경찰서를 나와 검찰 송치를 위해 이동하는 모습. 연합뉴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에게 총을 쏴 숨지게 한 야마가미 데쓰야를 태운 차량이 10일 오전 일본 나라 서부경찰서를 나와 검찰 송치를 위해 이동하는 모습. 연합뉴스.

기시다, 향후 노선ㆍ당내 입지 관건

다만 일각에선 기시다 총리가 아베 전 총리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기 색깔을 낼 역량을 확보할 경우, 장기적으로 한ㆍ일 관계에 청신호가 켜질 거란 기대도 나온다.

실제로 그간 한국을 향한 기시다 내각의 '몽니'의 배후엔 아베 전 총리의 우경화 압박이 있었다. 지난 1월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노역 현장인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는 과정에서도 당초 기시다 총리는 한국의 반발을 의식해 보류하려고 했지만, 아베 전 총리가 "한국에 밀려서는 안 된다"고 나서면서 결국 추천을 결정했다고 한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 4월 한ㆍ일정책협의단을 만나서도 "한ㆍ일 관계 개선은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라며 "규범에 기반한 국제 질서가 심각하게 위협 받는 상황에서 한ㆍ일, 한ㆍ미ㆍ일 협력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참의원 선거 후 일본은 2025년까지 대형 선거가 없다. 기시다 총리가 이 '3년의 황금기'를 주도권을 쥐고 대외 정책을 펴는 데 활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전직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자민당 내 파벌 구도의 역학이 기시다에게 유리해질 전망"이라며 "아베 없는 아베파는 예전 같지 않을 것이고 (현재 제2의 파벌인) 아소파는 기시다와 잘 맞는 편이라, 기시다 총리가 현재 예상되는 참의원 선거 승리를 발판으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할 여건은 더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아베파 내에서 아베의 빈 자리를 메울 '포스트 아베'가 아베보다도 강성 우파일 경우 견제가 쉽지 않을 거란 우려도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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