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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서 캥거루족 된 자식…60대 엄마는 "육아 퇴근 좀 하자"

중앙일보

입력

8일 서울 시내 전통시장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 연합뉴스

8일 서울 시내 전통시장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 연합뉴스

“‘엄마 찬스’를 포기할 수 없으니까요.”

6년 전 취직했지만 독립을 생각해본 적 없다는 직장인 정모(36)씨는 자신을 ‘자발적 캥거루’라고 소개하는데 거리낌 없다. 이른바 캥거루족이 고공 행진하는 물가 속에서 돈을 아낄 수 있는 합리적인 생활 방식이라고 생각해서다. 정씨는 “출·퇴근으로 왕복 2시간 넘게 쏟고 있지만, 월세나 생활비를 생각하면 부모님과 같이 사는 게 훨씬 이득이라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연령층 확대되는 캥거루족

새끼 캥거루는 어미의 육아낭(주머니)에서 자란다. 사진 픽사베이

새끼 캥거루는 어미의 육아낭(주머니)에서 자란다. 사진 픽사베이

자립할 나이가 됐지만,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기대는 캥거루족의 연령층이 높아지는 추세다. 지난 6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간한 보건복지포럼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만 19∼49세 성인 남녀 가운데 29.9%는 부모와 같이 사는 것으로 조사됐다. 성인 남녀 10명 가운데 3명은 캥거루족인 셈이다. 40대 미혼자가 부모와 동거하는 비율도 48.8%였다.

캥거루족의 연령대가 확대되는 이유로는 치솟는 물가와 주거비 부담 등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지금껏 부모와 한 번도 떨어져 산 적 없다는 직장인 A씨(33·여)는 “혼자 살고 싶을 때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라면서도 “결혼 전까지 부모님에게 얹혀살면서 돈을 모으는 게 요즘은 재테크라고 본다”고 말했다. A씨는 이어 “다만 60세를 훌쩍 넘긴 엄마에게 ‘나도 육아 퇴근 좀 하자’란 얘기를 들을 때 조금은 죄송하다”며 멋쩍어했다.

캥거루족의 중년화 등에는 만혼·비혼이라는 사회적 풍조가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도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팀은 “최근의 만혼과 비혼 확산이 주거 독립 시기를 늦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미혼인 40대 누나가 부모와 함께 산다는 직장인 임모씨는 “부모와 떨어지는 건 나이 문제가 아니라 결혼이나 사회적 안정이 이뤄져야 가능한 일 같다”고 말했다.

월세 오르면서 ‘돌아온 캥거루’

지난 5월 24일 서울 시내의 한 대학교 구내식당에서 학생이 메뉴판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5월 24일 서울 시내의 한 대학교 구내식당에서 학생이 메뉴판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에는 부모 품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성인들도 적지 않다. 30대 직장인 문모(여)씨는 직장 문제로 서울에서 홀로 살다가 최근 경기도에 있는 부모님 집에 들어가 살기로 결정했다. 문씨는 “월급은 그대로인데 근래 월세가 20만원 이상 오르면서 생활비 부담이 너무 커져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 월세 급등으로 주변에 자취방을 내놓고 부모 집으로 들어가는 걸 고민하는 친구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도 “자취를 해보니 다들 왜 캥거루족의 삶을 사는지 이해하게 되는 요즘”이라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캥거루족이 나이를 먹는 만큼 동거하는 부모도 늙는다. 이에 따른 ‘웃픈(웃기고 슬픈)’ 사연도 온라인상에 넘쳐난다. 최근 한 카페에는 “자신이 캥거루라는 40대 백수 친구가 이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느끼지 않아 걱정”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일흔 넘어서도 자식 먹여 살리고 있는 친구 부모님이 안쓰럽다”고 적었다. 이글에는 “한숨 나온다” “답답하다”와 같은 댓글이 잇따랐다.

전문가들은 캥거루족의 노후화가 경제 침체를 의미하는 경고등이라고 진단한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가 성장을 멈춘 사회라는 걸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라며 “물가는 날로 오르는데 소득은 그대로니 캥거루족이 합리적인 선택이 돼가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어 “이런 추세가 이어진다면 사회적으로 저출산이 심화하고 노동인구가 줄어들기 때문에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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