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 여성이 판단할 의료 문제” vs “임신 6주 이후엔 금지를”

중앙선데이

입력 2022.07.02 00:02

업데이트 2022.07.04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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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5호 02면

국내로 번진 낙태권 논쟁

지난 5월 14일 미국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을 수 있다는 보도가 나오자 워싱턴 DC에서 낙태 찬성론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워싱턴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5월 14일 미국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을 수 있다는 보도가 나오자 워싱턴 DC에서 낙태 찬성론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워싱턴 로이터=연합뉴스]

“헌재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린 것은 낙태를 합법화한 것이 아니다. 태아의 생명권과 자기 신체에 대한 여성의 결정권이라는 상충되는 두 가지 목표를 조화시킬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라는 것이다. 국회에서 물꼬를 터야 하는데 논의가 지지부진하다 보니 후속 조치가 하나도 이뤄지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미국 대법원의 판결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낙태에 대한 입법공백 상태를 서둘러 해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바른인권여성연합 대변인 연취현 변호사는 “시간이 지난다고 의견이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논쟁이 더 격해질 사안이기 때문에 조속한 입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자기낙태죄·동의낙태죄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지만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후속 입법은 이뤄지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헌재 결정이 나온 이듬해 임신 14주까지는 전면 허용, 14~24주는 사회·경제적 이유가 있어야 허용한다는 개정안을 냈지만 국회에서 찬반양론이 대립하며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법원, 관련 판결서 속속 무죄 선고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허용 기간’과 ‘낙태 사유’다. 21대 국회에는 낙태죄 관련 형법 개정안이 총 6건 계류돼 있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낸 개정안은 6주나 10주의 기간을 정하고, 그 이후에는 낙태를 금지한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의원들이 낸 개정안은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거나 24주 이내에는 임신중지를 전면 허용하는 내용이다. 국민의힘에서는 이달 들어서만 낙태 제도와 관련된 두 건의 입법 토론회를 열어 ‘10주 기준’을 다시 들고 나왔지만 야당 등의 반발이 크다.

여성계는 낙태에 대한 처벌 조항은 이미 사라진 것이고, 낙태를 어떻게 지원해야 할지의 관점에서 입법을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김정혜 박사는 “이미 효력을 상실한 처벌 조항을 다시 만들어 제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제한 여부를 누가 판단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며 “낙태의 문제는 여성 본인의 판단을 근거로 의료의 영역으로 넘기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박사는 “지금은 건강보험 적용, 취약계층의 낙태 지원 방안 등을 논의할 때”라고 덧붙였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의 당사자 노마 멕코이가 미 대법원서 낙태찬성 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로 대 웨이드’ 판결의 당사자 노마 멕코이가 미 대법원서 낙태찬성 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반면 종교계에서는 낙태가 쉬워질 경우 부작용이 심각해질 것을 우려했다. 가톨릭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사무국장인 박정우 신부는 “아이를 임신한 순간 한 생명이 시작하는 것이며, 생명의 존엄성은 어떤 가치보다 소중하다”며 “낙태를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꼭 관련법이 있어야 하면 6주 미만의 태아에 한해서만 허용해 낙태를 최소화 해야한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도 태아의 심장 박동을 특정할 수 있는 6주 이후에는 낙태를 금지하는 주가 많다는 것이다.

국내에서의 낙태 논란은 지난 24일(현지시간) 미국 연방 대법원이 이른바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연방대법관 9명 중 5명의 찬성으로 공식 폐기하면서 가열됐다. 로 대 웨이드 사건은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낙태가 금지된 텍사스주에 거주하던 미혼 여성 노마 맥코비(당시 22세)는 원치 않는 임신을 했지만 금전적인 이유로 낙태가 허용되는 다른 주에 가서 시술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자 이듬해 소송을 냈다. 낙태 금지에 관한 텍사스주 법이 헌법으로 보장된 사생활에 대한 권리에 위배 된다는 취지였다. 신변 보호를 위해 ‘제인 로’라는 가명을 쓴 맥코비는 당시 댈러스카운티 지방검사장 헨리 웨이드를 상대로 소를 제기했다. 두 사람의 성을 따서 ‘로 대 웨이드’로 불린다. 1973년 미 연방 대법원은 찬성 7표, 반대 2표로 로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49년 만에 판결이 뒤집히면서 낙태는 헌법상의 권리가 아니라 각 주 정부나 의회가 허용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사안으로 바뀌게 됐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는 각 주마다 임신을 중단할 권리를 어느 선까지 인정할지를 두고 보수와 진보 진영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26개 주가 낙태를 법으로 금지하거나 극도로 제한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오는 11월 중간선거의 가장 큰 쟁점 중 하나가 될 전망이다. 김정혜 박사는 “미국의 이번 판결은 국제적인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실제 미국을 제외한 국가에서는 낙태권을 확장하는 추세다. 미 생식권리센터(CRR)에 따르면 지난 25년간 50여 개국이 낙태에 대한 접근권을 높이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했다. 가톨릭 신자가 대부분인 멕시코가 지난해 낙태를 무조건적인 처벌 대상에서 제외한 데 이어 지난 2월에는 콜롬비아 헌법재판소가 임신 24주까지의 낙태를 합법화하는 판결을 내렸다. 역시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는 2018년 국민투표로 헌법상 임신 12주 이내의 중절 수술은 그 이유에 제한을 두지 않기로 결정했다.

캐나다 역시 1988년 낙태를 금지하는 연방법을 폐기했다. 러시아, 베트남 등에서도 특별법을 제정하거나 보건법 일부 조항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낙태권을 입법화했다. 독일, 영국, 프랑스 등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낙태를 광범위하게 허용한다. 독일은 지난 24일 낙태 관련 광고를 금지한 형법 조항을 삭제하기도 했다. 마르코 부쉬만 독일 법무장관은 “의사가 낙태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게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시대에 발을 맞추지 않는 것”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 법원도 헌재 결정 이후 낙태죄 조항이 효력을 상실한 것으로 보고 관련 재판에서 속속 무죄를 선고하고 있다. 2020년 4월 서울중앙지법은 낙태 시술을 한 산부인과 의사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같은 해 7월 대전지법 역시 시술받은 여성과 의사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해 4월 수원지법도 임신 5주 차에 중절 시술을 한 여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낙태 경험 여성 60%가 30세 미만

문제는 감감 무소식인 후속 입법 조치 탓에 힘없는 사회초년생 여성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다는 점이다. 보건복지부가 2019년 성관계 경험이 있는 15~44세 여성 1만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755명이 임신중단을 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 가운데 20~29세 여성이 437명으로 절반이 넘는다. 19세 이하(13명)까지 합치면 낙태 경험이 있는 여성의 60%가 30세 미만이다. 연취현 변호사는 “낙태의 위험성에 대한 지식 없이 피임약 등 불법적인 낙태를 시도하거나, 낙태에 실패하여 영아를 살해하는 지경에 이르는 불행한 사태가 20대, 30대 여성들에게 일어나는 것은 그저 남의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정혜 박사는 “낙태가 실제 몇 건이 발생하는지 집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임신 중절을 제한하는 국가에서 임신중절 시기가 늦어지고 관련된 여성 사망자도 늘어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불법인 낙태약만이라도 합법화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전 여성가족위원회 차인순 수석전문위원은 “지지부진한 논의의 가장 큰 문제는 건강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여성들이 계속 늘어난다는 것”이라며 “몇 주차까지 낙태를 허용할 것인지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면 먼저 ‘미프진’ 등 낙태약을 합법화하는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정혜 박사 역시 “낙태약을 불법으로 규정한 결과 정식 수입을 하지 않기 때문에 위험성과 비용이 증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연 변호사는 “낙태가 지금 합법인지 불법인지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약물을 허가해주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여성과 태아를 정치권에서 표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지 않는 것이 우선”이라며 “이 문제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내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처벌 규정 개정뿐 아니라 보건의료정책, 교육정책, 노동정책 등 사회 전 영역에서 제도 개선이 함께 이뤄져야한다는 제언도 나온다. 차인순 전 위원은 “처벌 조항과 관련한 논의들도 중요하지만 당사자인 여성이 의료적 정보뿐 아니라 자기결정에 필요한 임신·임신중단·출산 그리고 양육과 관련된 종합적인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어야 한다”며 “국회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지원과 논의가 함께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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