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정하의 시시각각

당해보니 시위 소음 폐해 알겠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김정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정하 정치디렉터

김정하 정치디렉터

문재인 전 대통령의 양산 사저 앞에서 벌어지는 보수단체ㆍ유튜버 등의 극렬 시위 때문에 더불어민주당이 잔뜩 화가 났다. 민주당은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해결 방안을 마련하라고 압박하는 한편, 친문 직계 의원들은 경찰청ㆍ양산경찰서를 방문해 경찰의 적극적인 대처를 요구했다. 개인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거나 욕설ㆍ증오 발언 등을 못 하게 하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개정안도 여러 건 제출했다.

MB 고통에 무관심했던 민주당 #문재인의 수모로 소음 문제 눈떠 #규제 강화해 정서적 피해 막아야

아닌 게 아니라 유튜브에서 들여다본 양산 시위는 상욕과 저주가 난무하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였다. 매일같이 그런 불쾌한 소음에 장시간 노출되면 듣는 당사자들은 정신적인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다 싶다. 양산 시위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민주당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귀향 둘째 날인 5월 11일 경남 양산 평산마을 문 전 대통령 사저 앞 도로에서 보수단체 회원들이 확성기를 동원해 문 전 대통령 비판 시위를 벌였다.  [뉴스1]

문재인 전 대통령의 귀향 둘째 날인 5월 11일 경남 양산 평산마을 문 전 대통령 사저 앞 도로에서 보수단체 회원들이 확성기를 동원해 문 전 대통령 비판 시위를 벌였다. [뉴스1]

그런데 5년 전으로 가보자. 2017년 10월부터 넉 달 동안 이명박(MB) 전 대통령의 서울 논현동 자택 앞에선 진보단체의 MB 구속 촉구 집회가 매일 벌어졌다. 얼마 전 문 전 대통령의 딸 다혜씨가 양산 시위에 불만을 표시하며 “집안에 갇힌 생쥐 꼴이다. 창문조차 열 수 없다”고 한탄했는데, 5년 전 MB의 신세가 딱 그랬다. 실제로 당시 진보단체 회원들은 MB를 향해 “쥐XX”라며 욕설을 퍼부으며 각종 인신공격성 이벤트를 벌였다. “영산강에서 직접 퍼왔다”며 녹조 물을 자택 대문에 뿌리는 일도 있었다. 당시 민주당에서 MB 사저 시위를 만류했단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일부 민주당 의원은 직접 시위에 동참해 MB 공격을 독려하기도 했다.

2017년 11월11일 민병두 더불어민주당 의원(왼쪽에서 두번째)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서울 논현동 사저 앞에서 이 전 대통령의 출국금지를 요구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  [민병두 전 의원 페이스북]

2017년 11월11일 민병두 더불어민주당 의원(왼쪽에서 두번째)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서울 논현동 사저 앞에서 이 전 대통령의 출국금지를 요구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 [민병두 전 의원 페이스북]

문명국가에서 우리가 당했으니 너희도 당해 보라는 식의 보복에 찬성할 순 없는 노릇이다. 증오의 확대재생산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황폐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MB의 고통엔 무관심했던 민주당이 문 전 대통령의 수모 덕분에 현행 집회ㆍ시위 문화의 문제점에 눈뜨게 됐다면 그건 부분적으로 역사의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진작부터 알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어떤 일들은 반드시 자신들이 체감해 봐야 알게 되는 법이다. 다만 민주당 일각에서 나오는 “집회ㆍ시위 금지 장소에 전직 대통령 사저를 추가하자”(정청래 의원)는 주장은 제대로 된 해법이 아니다. 특정인을 보호하기 위한 임시방편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보편타당한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 또 민주당은 혐오ㆍ증오ㆍ모욕 집회를 금지하자는데, 이는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와 정면충돌할 가능성이 크다. 나아가 정부가 일방적으로 특정 집회를 혐오 조장으로 규정하고 집회를 금지하는 권한을 갖게 되면, 집권 세력이 정치적으로 악용할 소지가 다분하다.

요즘 한국에선 문 전 대통령이 가장 절실하게 느끼고 있겠지만, 집회ㆍ시위의 가장 큰 문제는 터무니없이 큰 소음이다. 현재 형식적 소음규제 기준(주거지역 65~60db, 기타지역 75~65db)이 있다곤 하지만 기준이 느슨해 시위대가 빠져나갈 구멍이 많다. 심지어 1인 시위는 집시법 대상이 아니라 소음규제 기준 자체가 없다. 이번 양산 시위의 경우 대부분이 1인 시위였다. 확성기를 아무리 크게 틀어도 처벌이 범칙금에 불과하니 겁을 안 낸다. 1인 시위까지 포함해 시위 소음을 합리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새 대책이 나와야 한다.

지난해 5월 6일 오후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전국금속노동조합연맹 삼성그룹노동조합연대 관계자들이 임단투 승리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5월 6일 오후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전국금속노동조합연맹 삼성그룹노동조합연대 관계자들이 임단투 승리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집회 소음으로 고통받는 건 전직 대통령뿐만이 아니다. 삼성ㆍ현대차ㆍLG 등 대기업 사옥 주변은 각종 집회 소음으로 난장판이 된 지 이미 오래다. 상습 시위 구역 주변에 거주ㆍ근무하는 사람들은 신경쇠약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시위를 금지하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아이들이 듣기에 민망한 욕설이나 불쾌감을 유발하는 장송곡 같은 것을 확성기로 계속 틀어대 주변인들에게 심각한 정서적 피해를 주는 행위는 막자는 것이다. 양산 시위만 해도 확성기 소음만 적절히 통제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커질 일이 아니었다. 정부와 국회의 현명한 검토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