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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퍼스트레이디라는 자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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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몇 번의 신청 끝에 초여름의 청와대를 관람할 기회를 얻었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 말 언론사 간부 초청 행사로 본관에 들어가 본 적은 있으나 그때는 여기저기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 대통령 부인 집무실(무궁화실)이 대통령 집무실로 올라가는 중앙 계단 옆에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접견실과 회의실까지 갖춘 공간은 규모도 제법 되고 인테리어도 화사했다. 그러나 대통령 집무실 아래에 둔 의미는 무엇일까. 내 멋대로의 해석은 이렇다. "대통령 부인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러나 '획득한' 지위가 아니라 '획득된' 지위라는 걸 잊지 마라." 부부유별 같은 고리타분한 가치관에서 비롯된 공간 배치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백악관 내 미 대통령 부인의 집무실도 오벌 오피스(대통령 집무실)가 있는 웨스트윙과는 떨어진 이스트윙에 있다.

김건희 여사가 지난 12일 서울 성수동 메가박스에 영화 관람에 앞서 구입한 팝콘을 들고 있다. 이 사진은 팬 클럽 회장인 강신업 변호사의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됐다. [강신업 변호사 페이스북 캡쳐]

김건희 여사가 지난 12일 서울 성수동 메가박스에 영화 관람에 앞서 구입한 팝콘을 들고 있다. 이 사진은 팬 클럽 회장인 강신업 변호사의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됐다. [강신업 변호사 페이스북 캡쳐]

김건희 여사 논란을 보면서 느꼈던 아쉬움은 절제다. 김 여사는 대선 기간 잇단 구설수에 몸을 낮추면서 '조용한 내조'를 다짐했다. 하지만 취임 후 완연히 자신감을 되찾은 듯 광폭 행보를 했다. 처음 몇 장면은 괜찮았다. 일반인처럼 대통령 부부가 일상을 즐기는 모습이 신선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팬 카페를 통한 사진 공개는 팬들의 '추앙'을 원하는 셀럽(유명인)을 닮았다. 옷과 가방·장신구 등은 '핫 아이템'이 됐다. 홍보 전략이라면 실패다. 대중의 호기심은 자극했지만, 절제를 못 한 바람에 그 이상의 반감을 자아냈다.

공적 보좌 통한 투명화 필요하나 #친인척 비리 문제 반복 않겠다는 #당사자 각오와 의지가 가장 중요

대통령 부인의 리스크 해소 방안으로 제2부속실 부활이 거론된다. 특이하게 야권의 목소리가 더 크다. 제2부속실이 설치되면 국회 국정감사 등을 통한 견제와 감시가 쉬워지기 때문일 것이다. 여권도 제2부속실 폐지 공약을 깨는 것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공식 보좌 조직의 필요성은 공감하는 분위기다. 윤석열 대통령도 "차차 생각해 보겠다"며 여지를 남겨 뒀다.

제2부속실이든 뭐든 공식 보좌 조직은 필요하다. 그러나 공식 조직만으로 리스크가 해소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여태껏 불거졌던 친인척 비리가 과연 공식 보좌 조직이나 감시·감독 기구가 미비한 탓이었던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겐 비극적 탄핵을 막을 수 있는 계기가 두 번이나 있었다. 이른바 '십상시 문건'과 '이석수 특별감찰관 사태'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정보 유출이라는 비본질적 문제를 빌미 삼아 스스로 경종을 꺼버렸다. 문제는 결국 사람이다. 헌정사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비상한 각오와 의지가 없다면 백약이 무효다.

김 여사가 내조에 충실해야 한다는 여론이 60%에 달한다는 조사가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 활발하게 자기 세계를 구축했던 사업가 출신 퍼스트레이디에게 조용히 남편 뒷그림자만 밟으라는 건 시대착오적이다. 본인의 개성과 장점을 살리면서도 시대 감각에 맞는 적절한 역할을 고민해야 한다. 미셸 오바마의 아동 비만 퇴치 운동인 '레츠무브' 캠페인, 낸시 레이건의 마약 퇴치 운동인 '아니라고만 말하라(Just Say No)' 캠페인 등을 참고할 만하다. 이왕이면 좀 더 낮은 곳에서 사회 통합과 약자 배려를 위해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으면 한다.

백악관 홈페이지에는 역대 대통령 부인 소개 코너가 있다. 질 바이든 여사의 소개 글에는 공식 트위터까지 링크해 놓아 최근 활동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했다. 사진 한 장 찾을 수 없어 아예 배우자의 존재를 지운 듯한 우리 대통령실 홈페이지와는 대조된다. 사실상 직무 유기다. 그러는 사이 밖에서는 통제 안 되는 팬덤 현상과 이를 이용한 호가호위 추태가 벌어지고 있다.

윤 대통령은 김 여사의 봉하마을 조문 논란 뒤 도어스테핑(출근길 즉석 문답)에서 "대통령을 처음 해보는 거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라며 당혹감을 나타냈다. 사실은 국민이 더 당혹스럽다. "이런 퍼스트레이디 우리도 처음이라서"라고 답하고 싶은 심정이다. 분명한 건 있다. 리스크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관리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