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오전 경북 군위군 부계면 팔공산 자락에 자리한 한 ‘작은영토’ 식당. 한적한 풍경과 달리 식당 주방은 음식 준비로 분주했다. 주방에선 북어와 건새우로 맛을 낸 육수에 된장을 푼 시래깃국이 팔팔 끓고 있었다. 육수는 북어대가리와 다시마, 무, 파, 표고버섯 등을 풍성하게 넣어 빼낸 것이라고 했다.
깊은 맛이 밴 육수에 시래기를 넣은 국뚝배기 옆에서는 고소한 기름냄새가 났다. 뒷산에서 나는 산나물과 부추를 넣어 만든 장떡이 부쳐지는 향이었다. 한 국자씩 뜬 장떡 반죽을 팬에 올릴 때마다 소나기 내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 부쳐진 장떡은 근처에서 딴 감잎을 위에 얹어 장식했다. 고등어도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구워졌다.
메인 반찬인 장떡과 고등어구이가 만들어지자 소박한 반찬들이 곁들여졌다. 보리등겨로 만든 등겨장, 망초대나물·산나물·뽕잎나물 등 3색 나물, 김치와 마늘종장아찌, 궁채장아찌, 물김치 등이다. 일명 ‘행복한 바보밥상’이 맛깔스럽게 차려졌다.
이날 밥상은 고(故)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이 즐겨 먹었던 끼니를 재현했다. 김 추기경의 발자취를 찾아 군위군 농업기술센터가 군위를 찾는 천주교 순례객들을 위해 2018년 개발을 시작했다. 김 추기경은 유년시절을 군위에서 보냈으며, 6일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밥상은 100년 전 태어난 김 추기경이 생전에 즐겨 먹었던 음식들로 구성됐다. 군위군 농업기술센터와 함께 밥상 개발에 나선 군위군우리음식연구회 강병숙 회장은 “김 추기경이 생전에 어떤 음식을 자주 먹었는지 기록된 자료가 없어 수소문 끝에 김 추기경을 13년간 모셨던 김성희 유스티나 비서수녀를 찾아갔다”며 “언론과 일절 인터뷰를 하지 않는 수녀님을 끈질기게 설득해 자문을 얻었다”고 했다.
행복한 바보밥상에 오르는 시래깃국은 다진 쇠고기를 고명으로 얹은 것이 특징이다. 치아가 건강하지 못해 시래깃국을 자주 먹었던 김 추기경의 건강과 소화를 고려해 쇠고기를 잘게 다져 넣었다고 한다.
고등어구이는 김 추기경이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처음 주임신부로 부임한 곳이 경북 안동성당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안동은 간고등어가 유명한 지역이다. 나머지 메뉴도 김 추기경의 성품에 맞게 소박하게 구성했다. 행복한 바보밥상은 김 수녀의 자문을 얻어 2020년 3월 완성됐다.
행복한 바보밥상을 맛볼 수 있는 곳은 부계면 내 작은영토, 효령면 내 고지바위권역다목적센터와 본가원 등 세 곳이다. 육수를 푹 끓이는 데 꽤 시간이 걸려 식당을 찾기 전 예약은 필수다.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김 추기경은 교황청이 선정한 ‘신앙의 증인’이자 1969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추기경에 서임된 인물이다.
군위군은 김 추기경이 5살부터 초등학교 5학년까지 살았던 곳이다.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도 군위와의 인연이 나와 있다. “다섯 살 무렵에 구미와 가까운 군위로 이사했다. 선산에서 군위로 이사 가느라 큰 고개를 넘은 기억이 선명하다.” 추기경의 모친이 김 추기경에게 “신부가 돼라”고 한 곳도 군위다.
군위에는 김 추기경의 생가가 있던 자리에 ‘사랑과 나눔공원’이 조성돼 있다. 공원 옆 기념관에서는 격동의 한국 역사 속에서 정치적·사회적 안정을 위해 노력한 김 추기경의 인생을 살펴볼 수 있다. 2009년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말을 남긴 채 선종한 김 추기경의 뜻을 들여다보기 위해 기념관을 찾는 이들이 많다.
어린 시절부터 김 추기경의 정의감은 남달랐다. 서울 동성상업학교 재학 시절 윤리시험 때 낸 답안이 대표적이다. 그는 “천황 폐하의 생신을 맞이해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고 하자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그러므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일화도 그의 성품을 잘 대변해준다. 김 추기경은 1971년 12월 25일 밤 KBS로 중계된 예수성탄 대축일 자정 미사 강론 중 작심발언을 했다. 그는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른 일인가? 만일 현재의 사회 부조리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독재 아니면 폭력 혁명이라는 양자택일의 기막힌 운명에 직면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일화도 있다. 그는 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하자 전 전 대통령을 찾아가 “그만해 달라”고 부탁했다. 또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에게는 편지와 함께 “긴급구호를 위해 쓰라”며 당시 거액이었던 1000만 원 수표를 보냈다. 김 추기경은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광주의 5월”이라고 회고했다.
김 추기경은 6일(음력 5월 8일)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탄생일을 기념해 전국 곳곳에서 행사가 준비돼 있다. 서울가톨릭연극협회는 연극 ‘추기경 김수환’을 서울 서강대 메리홀(1~10일)과 대구 범어대성당 드망즈홀(14~15일)에서 공연한다. 범어대성당(7월 13~19일)과 군위 사랑과 나눔공원(7월 20~31일)에서는 ‘탄생 100주년 기념 김수환 추기경 사진전’도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