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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반도체, 호황에도 시총 90조 증발…'칩 동맹'이 초격차 기회다 [기로에 선 K반도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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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일 삼성전자 평택 공장을 방문한다. 사진은 지난달 29일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내 나노종합기술원을 방문한 윤 대통령과 지난해 4월 백악관에서 열린 반도체 서밋에서 웨이퍼를 들어 보이고 있는 바이든 대통령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일 삼성전자 평택 공장을 방문한다. 사진은 지난달 29일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내 나노종합기술원을 방문한 윤 대통령과 지난해 4월 백악관에서 열린 반도체 서밋에서 웨이퍼를 들어 보이고 있는 바이든 대통령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방한 첫 일정으로 20일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평택캠퍼스)을 찾는다. 미국 대통령이 첫 일정으로 국내 기업을 방문한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다. 자국 중심으로 반도체 공급망을 재편하려는 미국의 의중이 담긴 행보다. 윤석열 대통령도 동행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영접한다. 이번 방문은 요동치는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의 한 가운데 선 한국(K)-반도체의 위상과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될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바이든 평택 방문,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 부각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전경 [사진 삼성전자]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전경 [사진 삼성전자]

문재인 정부 시절 청와대 경제보좌관을 지낸 김현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미국은 중국을 배제한 채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하려 한다”며 "그 중 핵심이 반도체이고,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 것"이라고 말했다. 박영준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명예교수 역시 “중국에 빼앗긴 제조업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미국 입장에서 반도체 제조 강국인 한국과 손잡는 것이 미국 첨단 제조업 경쟁력과 직결된다는 것을 인식한 행보"라고 해석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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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참여하기로 한 미국 주도의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도 같은 맥락이다. 24일 출범하는 IPEF는 ‘반중(反中) 연대’ 성격을 띤 경제 규합체다. 관세 등을 철폐하는 자유무역협정(FTA)과 달리 글로벌 공급망 협력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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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기로에 서있다. 사상 최고의 실적을 내고 있지만 주요 반도체 기업의 주가는 하락세다. 미래 경쟁력을 의심하는 시각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요 경쟁국은 '반도체 자국주의' 기치 아래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고 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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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의회는 반도체 산업에 5년간 520억 달러(약 66조3000억원)를 지원하는 ‘미국 혁신경쟁법’을 올 2월 통과시켰다. 또한 반도체 시설 투자에 대해 최대 25%를 세액 공제해주는 내용을 담은 ‘미국 반도체 촉진법’이 지난해 6월 발의됐다.

중국은 미국의 견제에도 ‘반도체 굴기’를 꺾을 생각이 없다. 지난해 발표된 중국 내 신규 반도체 공장 건설 프로젝트만 28개, 투자금은 260억 달러(약 33조1300억원)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는 “중국의 전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이 2020년 9%에서 2024년 17%로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반면 한국은 2020~2024년 20%가량을 유지하는 데 그칠 것으로 예상됐다.

지난 2월 유럽 반도체 법안을 발표하는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왼쪽)과 지난 4월 반도체 공급망 강화 등을 담은 경제안보법을 통과시킨 일본 중의원 [연합뉴스]

지난 2월 유럽 반도체 법안을 발표하는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왼쪽)과 지난 4월 반도체 공급망 강화 등을 담은 경제안보법을 통과시킨 일본 중의원 [연합뉴스]

일본의 경우 올 4월 반도체 등 필수 공급망에 약 5조원의 재정 지원을 하는 경제안보법이 중의원을 통과했다. 유럽연합(EU) 역시 지난 2월 첨단 반도체 생산능력 4배 확대 등을 담은 ‘유럽 반도체법’을 발의했다. 이를 위해 EU는 430억 유로(약 58조원) 이상의 펀드를 조성할 방침이다. TSMC와 미디어텍을 앞세운 대만은 반도체 리쇼어링(본국 회귀)과 해외 진출 전략을 병행하고 있다.

지난해 5월 13일 경기 평택 삼성전자 평택단지 3라인 건설현장에서 열린 K-반도체 전략보고회. [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해 5월 13일 경기 평택 삼성전자 평택단지 3라인 건설현장에서 열린 K-반도체 전략보고회. [청와대사진기자단]

업계·학계 요구 외면한 '반도체 특별법'  

정부와 기업이 넋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5월 문재인 정부는 'K-반도체 전략'을 발표했고, 올 1월엔 반도체를 포함한 ‘국가첨단전략산업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과정은 지지부진했고, 내용은 미흡했다. 전략 수립 8개월이 지나 국회 문턱을 넘은 법안은 '반쪽짜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반도체 업계가 강력히 요청했던 투자 인센티브가 미흡하고, 인력 양성 지원 정책 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는 “K-반도체 초격차 전략을 발표해 놓고는 삼성이나 SK 같은 대기업만 혜택을 볼 것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전 정부와 정치권이 제대로 된 정책과 법안을 내놓지 못했다”며 “반도체 부흥을 위해 정부와 기업이 ‘원팀’으로 움직이는 주요 선진국을 보면 식은땀이 흐른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에서 이 법을 포함한 반도체 초격차 전략을 보완·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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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에 겨우 삽을 뜬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반도체 기업들의 ‘기술 경쟁’도 불을 뿜고 있다. 파운드리 시장 재진출을 선언한 인텔은 미국 애리조나와 오하이오주에 총 400억 달러(약 51조원)를 들여 반도체 공장 3곳을 짓기로 했다. 또 향후 10년간 950억 달러(약 121조원)를 투자해 독일 등에 신규 공장을 건설할 방침이다. 대만 TSMC는 미국 애리조나와 일본 구마모토현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는다. 특히 향후 1000억 달러(약 128조원)를 들여 미국에 반도체 공장 6개를 지을 예정이다. TSMC는 독일‧인도 정부와도 파운드리 건설 협상을 벌이고 있다.

반도체 용인 클러스터 조감도. 2019년 클러스터 구축 계획이 발표됐지만 약 3년을 끌다 최근에야 기초공사가 시작됐다. [사진 용인일반산업단지]

반도체 용인 클러스터 조감도. 2019년 클러스터 구축 계획이 발표됐지만 약 3년을 끌다 최근에야 기초공사가 시작됐다. [사진 용인일반산업단지]

한국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이 과감한 투자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중첩된 규제와 국가 지원 부족으로 애를 먹고 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대표적이다. 2019년 발표된 용인 클러스터 구축 계획은 각종 규제와 주민 갈등에 부닥쳐 3년 동안 삽도 뜨지 못하다가 최근에야 기초공사가 시작됐다. SK하이닉스가 120조원을 투자하는 용인 클러스터는 애초 2025년 말 양산이 목표였지만, 현재로썬 2027년에야 가동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한양대 교수)은 “용인 클러스터는 정부와 정치권, 지방자치단체의 무관심 속에 예정보다 1년 6개월 지연됐다”며 “여전히 용수‧도로 등 풀어야 문제가 많기 때문에 대통령 산하 콘트롤타워가 나서 풀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K-반도체 사상 최대 실적 냈지만, 지금이 위기”

SIA와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지난해 국가별 글로벌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미국이 54%로 압도적 1위고, 한국은 22%로 2위다. 반도체 생산능력 점유율(21%)도 대만(22%)에 이어 2위다. 한국 반도체 '투톱'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최근 실적도 더없이 좋다.

올해 들어 삼성전자·SK하이닉스 시총 90조 사라져  

하지만 메모리반도체를 제외한 시스템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의 경쟁력은 여전히 미약하다. 특히 반도체 공정의 첫 단계인 팹리스(설계) 분야에서 한국의 점유율은 고작 1%에 불과하다.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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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다 보니 K-반도체에 대한 시장의 평가도 냉랭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잇따른 호실적에도 19일 기준 시가총액이 지난 연말 대비 각각 72조원, 14조원 감소했다. K-반도체가 투자의 골든타임을 놓치면서 미래 경쟁력이 약해졌다는 시장의 의구심이 커졌다는 게 관련 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익명을 원한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는 "국내 반도체 업계는 올해도 사상 최대 실적이 예상되지만, 지금이 한국 반도체 산업 역사상 가장 절박한 순간이자 골든타임"이라며 "새 정부에선 말뿐이 아닌 실효성 있는 지원책을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평택사업장을 방문해 EUV 전용라인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지난해 1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평택사업장을 방문해 EUV 전용라인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바이든 방한을 기회로 삼아야  

이번 바이든 대통령의 평택 방문이 한국에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김형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차세대반도체연구소장은 “이번 바이든 방문을 계기로 한·미 양국이 반도체뿐 아니라 양자컴퓨터 등 첨단 기술 주도권을 확보하는 협력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 속에서 한국이 몸값을 올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김현철 교수는 “한국 정부는 과거처럼 미·중 다툼에 새우 등 터진다는 생각으로 임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새우가 아닌 범고래 정도는 된다는 인식 아래 국제 관계를 설정하고 경제안보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한·미 반도체 동맹에 대해 중국이 불편한 기색을 보일 수 있지만 결국 한국 정부가 선택할 문제”며 “중국 눈치 보고 걱정하느라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동맹 참여를 주저할 일은 결코 아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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