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산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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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이제는 뿌리로
돌아가는 때입니다
가지마다 떨고 있는
오뇌의 잎새들이
깊은 밤
잠의 둘레를
서성이다 떠납니다
얼마를 기다려야
가슴 여는 산입니까
능선을 칼질하는
낭자한 아픔들이
영혼을
활활 사르고
찬재되어 버립니다
잎을 떨군 나무처럼
사념들을 비워 내며
허허로이 빈손 들고
슬픈 햇살 속을 가면
조금씩
길을 연 산이
뿌리로 닿아 있습니다

<시작 메모>
만법귀일 일귀하처. 이러한 2중적 물음에 대한 의문이 가을 산행을 나서게 했나 보다.
시는 나에게 있어 구원의 생명을 탐색하는 수행 과정으로서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가을산은 생명의 심상을 구명코자 하는 상징적 물상이 되기도 한다. 지난여름 무성했던 사념의 잎새들이 단풍으로 마지막 불길을 태우면서 져 버리고 빈 나무들이 쓸쓸하게 서있다. 어쩌면 이러한 수목의 자태에서 존재의 참 모습을 찾아보게 되는 것 같다.
빈 나뭇가지 사이로 비로소 산길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그 길은 존재의 심상을 찾아가는 행로로 인식된 것이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갔는데, 돌아간 그 하나는 어디로 갔는가. 가을 햇살이 내리는 가운데 산은 아무 말이 없다.

<약력>
▲1945년 경남 고성 출생 ▲동아대 국문과 졸업 ▲시조집 『겨울 달빛 속에는』 ▲평론집『우리 시의 현주소』 ▲제6회 성파 시조 문학상 수상 ▲『부산 시조』 주간 ▲현 부산 건국 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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