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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장애인 시위 배경에 깔린 특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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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지하철이 멈춰 섰다. 전동차의 문은 닫힐 줄 몰랐다. 안내방송이 양해를 구했다. 장애인, 불법시위, 불편, 죄송. 이런 단어들로 구성된 문장이었다. 방송은 선명히 ‘불법’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불법이라는 그 시위는 왜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을까.

지하철에서는 다양한 장애인을 만난다. 환승로를 잃은 촌노, 뒤주 같은 캐리어를 끌고 가는 여행객, 우는 아이 안고 유모차 미는 부모, 그리고 저 한국어 방송과 멈춘 지하철 사이에서 당황해하는 외국인들. 장애인 고려 무장애설계를 가르치지 않는 건축학과는 인증도 받지 못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건축학 수업에서 낙제를 받았을 설계의 지하철역들은 디자인 수업에서 또 낙제를 받았을 명시도의 안내판들을 붙여놓고 다양한 승객들을 요리조리 시험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왜 변하지 않고 있을까.

특권과 차별은 함께 다니는 불평등
차별 철폐 주체들이 누리는 특권
도시 제도적 불평등은 자동차 특혜
지방선거, 특권과 차별 철폐의 기회

특권과 차별. 둘 다 불평등이되 샴쌍둥이처럼 같이 다니고 붙어 자란다. 소수가 이익을 취하면 특권, 소수가 불이익을 받으면 차별이라 부른다.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건 선언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저 선언이 중요한 건 그 불평등을 굳이 바로 잡겠다는 굳은 의지 표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중교통이라는 공적공간에서 장애인 차별은 왜 방치되어 왔을까.

이유는 명료하다. 차별을 줄이려면 특권을 줄여야 한다. 그러나 불평등을 바로 잡으라고 선출, 임명된 주체들이 특권층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지정된 주차공간과 관용차, 그리고 대개 수행기사가 제공된다. 일상의 차별을 깨닫지도, 공감하지도 못하는 먼 그대가 된다. 내가 만난 그들은 대개 지하철과 버스를 마지막으로 타본 게 언제인지 가늠도 못했다. 뜬 비행기는 몰라도 뜨려는 비행기는 잡아 놓을 수 있다는 게 국회의원 특권의 통설이다. 빵 없으면 과자 먹으라 했다는 혁명기 프랑스 왕비를 개탄할 일이 아니었다. 구중궁궐에서 나와야 할 것은 대통령만이 아니었다. 바쁘고 높고 귀하신 그들이 관용차 뒷자리에서 나와야 했다.

한국은 승용차 몰고 다닐수록 특혜를 받는 구조적 차별을 일상화해왔다. 사례는 이렇다. 주차는 도시공간의 사적, 배타적 점유건만 무료여야 한다는 전제가 당연시된다. 상업건물에서 법적으로 설치해야 하는 부설주차장 최소규모는 면적비 약 25% 남짓이다. 그런데 대개의 상업시설에서 일정 금액 구매자에게 주차요금을 면제한다. 주차장 이용료가 상품 금액에 공평하게 포함되어 있으니 승용차 이용이 합리적이다. 대중교통 이용자는 쓰지도 않은 주차장 임대료를 상품값으로 지불해야 한다.

개인적 사례는 이렇다. 서울대학교 캠퍼스는 자동차 천국이다. 지하철역에서 멀다는 것이 구실이다. 교수는 물론이고 박사과정에 들어서면 승용차 이용은 당연시된다. 학업과 연구에 바쁘신 우리가 이 멀고 넓은 캠퍼스에서 어찌 걷느냐고 불평하고 건물 앞 주차가 권리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월 정기주차요금은 교수회관 한끼 점심값이고 버스요금의 절반조차 되지 않는다. 당연히 주차장 부족하다 아우성이고 빈 구석마다 차 세우고 기회마다 녹지 잠식한다. 그러니 교수주차장 특혜와 학생 주차 차별은 불만과 쟁점이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대한민국 최고 지성 집합소라는 공간에서도 보행자 우선 원칙은 지켜지지 않는다. 제한속도 무시 질주하는 자동차 피해서 학생들은 캠퍼스 횡단보도를 목숨 걸고 뛰어 건너야 한다.

다른 사례는 이렇다. 친환경 자동차라는 허무맹랑한 단어가 있다. 그 물건은 안드로메다에서 생산되는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동력을 뽑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런 개인 이용 기계 서둘러 장만하라고 보행자의 세금으로 보조금 지급하는 것이 미래를 위한 공정한 정책인지 모를 일이다. 전기차 보조금 지급 예산이면 지하철역의 교통 편의시설, 저상버스는 다 구비하고도 충분히 남았겠다. 교통수단이 그나마 친환경이 되는 유일한 길은 함께 타는 것이다. 도시의 미래는 친환경 자동차라는 기만적 간판이 아니라 편리하고 저렴하고 공평한 대중교통 확충에 달려있다.

결론은 이렇다. 이동은 생존의 전제다. 대중교통 이용은 법전에 명시할 필요조차 없는 도시 생존기본권이다. 기본권 차별이 불법이지 기본권 확보 요구가 불법일 수 없다. 열차는 다시 멈췄다. 이번 안내방송에는 ‘불법’이라는 단어가 빠지고 설명이 친절해졌다. 몇 사람은 총총히 밖으로 나갔다. 마음속 생각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시위에 대한 불만을 밖으로 표현하는 승객들은 내가 탄 전동차에는 없었다. 나는 이것이 우리의 힘이리라 믿는다. 이들이 그런 이해와 의지로 지방선거 투표장에 들어서리라 믿는다.

이동 기본권 보장의 공감이 공정한 도시를 만든다. 공감 못하는 ‘나으리’들을 걸러내는 행위가 선거다. 지난 겨울 연탄 들고 찍은 사진이 공감의 증거라면 유권자 우롱이다. 일주일에 하루 이상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겠다는 지자체장 후보가 있다면 나는 그에게 투표할 것이다. 서울대 총장 선거도 올해 있더라. 나는 교원 처우 개선 말고 공정한 보행 캠퍼스 조성 공약의 후보를 지지하겠다.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