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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버림받은 애국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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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과학철학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과학철학

옛날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위인전을 참 많이 읽었다. 위인으로 꼽히는 사람들 중에 과학자들도 꽤 있었는데, 특히 과학적 업적이 훌륭할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귀감이 될 만한 인물들이었다.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했던 아인슈타인, 여성과학자로서 선구자적인 모범을 보여주었던 퀴리부인 등등. 그런데 업적이 탁월해도 위인전에 나오지 못하는 과학자들이 있다. 이들이 긍정적인 사회적 기여를 했는가를 따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독일의 화학자 하버(Fritz Haber)이다.

하버는 암모니아 합성에 기여한 공로로 191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간 지금 돌이켜보면 의아할 수 있다. 암모니아는 질소원자 한 개, 수소원자 세 개가 합쳐져 이루어진 아주 간단한 화합물이다. 분자식은 NH3. 그런 것을 가지고 노벨상까지? 구조는 간단해도 인공적으로 만들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적으로 생기는 암모니아는 질소를 포함한 유기물질이 세균의 작용으로 분해될 때 나온다. 소변을 방치하면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암모니아의 냄새이다. 그런데 이 불쾌한 암모니아는 아주 유용한 물질이다. 현대식 농업의 중요한 기반이 되는 화학비료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주요 원료이기 때문이다. 화학비료가 없다면 현재 세계인구의 절반은 굶게 될 것이라 추산한다. 그뿐 아니라 암모니아는 폭발물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주요 원료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 천박하고 하찮은 암모니아는 부국강병을 이루는데 필수적인 물질이었고, 각국에서 대량으로 생산하고자 노력했다.

독일의 노벨화학상 수상자 하버
암모니아 합성으로 부국강병 일궈
애국심으로 화학무기도 개발
유태인의 애국을 거부한 나치정권

하버는 암모니아 합성을 기초과학적 접근으로 해결했다. 암모니아를 만들고자 한다면 수소가스와 질소가스를 반응시키면 된다. 개념 자체는 아주 간단한데, 수소와 질소를 아무리 섞어 놓아도 영 서로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 반응을 시키기 위해서 가열을 해 보고, 압력을 높여보아도 별 효과가 없었다. 하버가 알아낸 것은 그 반응을 촉진시켜주는 촉매(catalyst)였다. 신기하게도 철(iron)이 수소가스와 질소가스를 결합시켜 주는 화학적 중매쟁이 노릇을 한다는 것을 알아냈으며, 그보다도 더 효과가 있는 것은 우라늄이나 오스뮴이었다. 그러한 촉매를 고온 고압하에서 투여했을때 암모니아가 잘 형성되었고, 하버가 알아낸 그 원리를 바스프(BASF) 회사 연구소에서 보슈(Carl Bosch)와 동료들이 실용적인 공정으로 발달시켰다.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하버-보슈 공정이라 칭한다.

그 공로로 하버는 노벨상을 받게 되었는데, 세계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다. 왜냐면 하버는 1차대전 때 자신의 화학 지식을 응용하여 화학 무기를 만들었고 그것을 사용하는데 진두지휘까지 하였기 때문이다. 1915년 벨기에의 이프르(Ypres)에서 독일군이 염소가스로 연합군을 공격했던 것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화학무기가 대규모로 사용되었던 악명높은 사건이다. 그 후로도 하버는 독일 화학무기 프로그램의 지휘자로 활동했다. 종전 후 화학무기에 대한 규탄이 심해지면서 하버는 전범으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서는 애국심에 불타서 한 일일 뿐이었다. 어떤 무기를 쓰건 간에 사람을 죽이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펼치며 화학전을 특별히 죄악시 하는데도 반대했다. 그는 암모니아 생산으로 조국의 농업과 군수산업에 기여했고, 화학무기를 만든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하버는 1차대전 이후에도 애국심을 계속 불태웠다. 패전 후 초토화된 독일의 경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그는 기발한 새로운 화학적 해결책을 내놓았다. 바닷물 속에 녹아있는 금을 추출할 수 있다면 독일 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정신 나간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바닷물에는 여러가지 광물질이 녹아 있고, 그 중에 미량의 금도 정말 있다. 그 금의 농도가 얼마나 되는지, 또 어떤 방식으로 뽑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하버는 다른 나라에서 모르게 몰래 비밀 연구를 하였다. 큰 성과는 올리지 못했다.

그런데 하버가 그토록 사랑했던 독일은 하버의 애국을 결국 거부한다. 하버는 유태인이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힘을 얻은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과학계에서도 유태인들을 제거했다. 국가적 영웅대접을 받고 있던 하버를 당분간 직접 손대지는 않았지만 그 귀결은 뻔한 것이었다. 그는 1933년에 독일에서 도피하였으나 다른 나라에서 그를 보는 시각은 차가웠다. 결국 이스라엘을 건국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그곳의 국립 과학연구소(현재 바이츠만 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제2의 조국을 찾아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길에 병으로 스위스에서 생애를 마치고 말았다.

하버의 비극적 생애는 단순한 영웅적 위인전에서 얻을 수 있는 것 보다 더 값진 교훈을 준다. 전문가가 생각없이 기술적 일에만 전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무조건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것도 위험하다. 자신이 세계 사회의 일원이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해야 하며, 특출한 능력이 있다면 거기에 따르는 복잡한 책임도 있다는 부담을 안아야 한다.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과학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