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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외면한 사이…1774번째로 떠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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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목 절개로 말을 할 수 없어 병상에 누워 손글씨로 소통했던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안은주씨의 2019년 말 모습. 사진 환경보건시민센터

목 절개로 말을 할 수 없어 병상에 누워 손글씨로 소통했던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안은주씨의 2019년 말 모습. 사진 환경보건시민센터

'안은주 오늘 새벽 사망.'
3일 오전 3시, 기자에게 문자메시지가 왔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안은주(54)씨가 눈을 감았다고 알리는 언니 안희주씨의 메시지였다. 환경보건시민센터에 따르면 안씨는 2011년 참사가 처음 알려진 뒤 1774번째로 숨진 피해자다.

[현장에서] 끝나지 않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

배구 선수 출신으로 11년간 투병한 안씨는 두 차례 폐 이식 후 건강이 악화했다. 말을 못 하는데 몸까지 굳어갔지만 손글씨로 소통하며 삶의 의지를 붙잡았다. 언니에게 "사랑해, 가지마"라고 써주던 그는 결국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의식을 찾지 못한 상태로 임종 면회를 했고, 가족 배웅 속에 세상을 떠났다.

설 연휴였던 지난 1월 31일 병상의 안은주씨가 언니에게 써준 글. 오른팔에도 마비가 와서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지만 희미하게 '가지마'(붉은색 네모)라고 적었다. 사진 안희주씨

설 연휴였던 지난 1월 31일 병상의 안은주씨가 언니에게 써준 글. 오른팔에도 마비가 와서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지만 희미하게 '가지마'(붉은색 네모)라고 적었다. 사진 안희주씨

2019년 두번째 폐 이식을 마친 뒤 말할 수가 없어 글로 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안은주씨의 심경. 사진 환경보건시민센터

2019년 두번째 폐 이식을 마친 뒤 말할 수가 없어 글로 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안은주씨의 심경. 사진 환경보건시민센터

안씨는 눈을 감고서야 그토록 가고싶던 고향 경남 함안으로 돌아갔다. 그를 태운 구급차가 병원을 떠날 때 "그만 아프고 편안한 곳으로 가길 바란다", "가습기 살균제로 또 한 사람이 떠나는구나"란 피해자들의 작별 인사가 이어졌다.

안씨는 생전 기업·정부에 참사 해결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가해 기업·피해자 간의 조정 작업은 옥시레킷벤키저·애경산업 두 기업의 거부로 사실상 무산됐다. 또 다른 책임 주체인 정부도 최소한의 피해 구제를 이어갈 뿐, 근본적 해결책을 찾는 데는 더디기만 하다. 참사의 시계가 멈춘 사이, 안씨 같은 피해자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남은 피해자들의 분노와 무력감만 커지고 있다.

한정애 환경부 장관이 지난해 8월 31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가습기 살균 피해자와 기업 간의 합의 사항 브리핑을 하고 있다. 이날 환경부는 조정위원장으로 김이수 전 헌법재판관을 추천했으며, 조정위를 구성하고 합의 절차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뉴스1

한정애 환경부 장관이 지난해 8월 31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가습기 살균 피해자와 기업 간의 합의 사항 브리핑을 하고 있다. 이날 환경부는 조정위원장으로 김이수 전 헌법재판관을 추천했으며, 조정위를 구성하고 합의 절차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뉴스1

참사가 알려진 지 10년째인 지난해 8월, 한정애 환경부 장관은 직접 피해 구제를 위한 사적 조정위원회가 꾸려진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걸로 사실상 정부 역할은 끝이었다. 조정위가 공식 출범한 뒤부터는 별다른 언급도 없었다.

조정 지원도 삐걱거렸다. 조정위가 정부에 '지금까지의 피해는 기업이 맡되 향후 발생할 피해자들은 정부에서 책임져달라'고 요청했지만, 양측 협의는 매듭짓지 못했다. 정부의 적극 개입 없이 민간에 맡긴 조정안은 공전에 빠졌고, 조정위는 기약 없는 활동 연장만 고심하고 있다.

한 장관은 임기 종료를 앞둔 3일 간담회에서 "굉장히 짧은 시간 내에 조정안 틀이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조금 더 시간을 갖고 국회의 (입법) 역할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치료비를 돌려받는 것도 눈치 보거나, 피해 인정이나 등급 판정이 늦어져 하염없이 대기하곤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5년 전 청와대에 피해자들을 초청해 "더 이상 안전 때문에 억울하게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하겠다" 공언한 게 사실상 허언(虛言)으로 끝났다.

한화진 환경부 장관 후보자가 2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의원 질의를 듣고 있다.김성룡 기자

한화진 환경부 장관 후보자가 2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의원 질의를 듣고 있다.김성룡 기자

윤석열 정부라고 다를지는 알 수 없다. 한화진 환경부 장관 후보자는 2일 국회서 열린 인사청문회 모두발언에서 가습기 살균제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연이은 의원들의 질의엔 "안타깝게 생각한다"거나 "다각도로 검토하겠다"는 원론적 답변 위주로 내놨다. 정부 개입에 대해서는 "기업이 계속 책임을 갖고 해결해야 한다"면서 선을 긋기도 했다. 청문회를 지켜본 한 피해자 유족은 "매우 실망스럽다. 조금이나마 가졌던 기대감도 사라졌다"고 했다.

일부 피해자 단체들은 3월 말 대통령직인수위 앞에서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하지만 인수위는 이들 단체가 보낸 입장 요청 공문에 아직 묵묵부답이다. 3일 인수위가 발표한 윤석열 정부 국정과제에도 가습기 살균제 해결은 찾기 어렵다.

가습기살균제합의를위한피해자단체 소속 회원들이 3월 31일 서울 종로구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가습기 살균제 참사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뉴스1

가습기살균제합의를위한피해자단체 소속 회원들이 3월 31일 서울 종로구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가습기 살균제 참사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뉴스1

끝나지 않은 가습기 살균제 참사

한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경과보고서는 청문회 다음날 채택됐다. 후보자 꼬리표를 떼고 장관 취임을 앞둔 한 후보자 앞엔 탄소중립, 미세먼지 등 많은 현안이 쌓여있다. 하지만 7712명(지난달 말, 피해구제 신청 기준)의 피해자가 나온 가습기 살균제 문제도 더는 미룰 수 없다. 어느덧 세 번의 정권을 거쳐 네 번째 정부를 앞둔 '묵은 과제'다.

미성년 피해자 박준석(15)군의 어머니 추준영씨는 2일 청문회장에 나와 애끓는 호소를 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가해 기업과 국가의 책임이 명백합니다. 환경부는 주무 부처로서 국가 책임을 다해 피해자를 구제하는 데 최선을 다해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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