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랑해, 가지마" 마비된 몸으로 썼다···1700명 앗아간 '가습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2면

2019년 두번째 폐 이식을 마친 뒤 말할 수가 없어 글로 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안은주씨의 심경. 사진 환경보건시민센터

2019년 두번째 폐 이식을 마친 뒤 말할 수가 없어 글로 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안은주씨의 심경. 사진 환경보건시민센터

설 연휴였던 지난달 31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입원실. 병상에 누운 안은주(54)씨가 반가운 듯 옅은 미소로 언니 안희주씨를 맞았다. 그는 목 절개로 말은 잘 못 하지만, 지난해까진 손글씨로 자주 대화를 나눴다. 은주씨는 1700명 넘는 이의 목숨을 빼앗은 가습기 살균제 참사 피해자다.

하지만 최근 병세가 악화되면서 하반신 마비에 의식까지 혼미해졌다. 오른팔마저 굳어가는 위독한 상황에도 힘겹게 펜을 잡고 알아보기 어려운 글자를 썼다. '사랑해, 가지마.' 희주씨는 "가지 말라고 할 때마다 발길이 안 떨어진다. 주치의 말처럼 하늘에 맡긴 상황"이라고 했다.

설 연휴였던 지난달 31일 병상의 안은주씨가 언니에게 써준 글. 오른팔에도 마비가 와서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지만 희미하게 '가지마'라고 적었다. 사진 안희주씨

설 연휴였던 지난달 31일 병상의 안은주씨가 언니에게 써준 글. 오른팔에도 마비가 와서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지만 희미하게 '가지마'라고 적었다. 사진 안희주씨

배구 선수·심판 출신인 안씨의 삶은 가습기 살균제 사용을 계기로 180도 바뀌었다. 2011년 쓰러진 뒤 2015년과 2019년 두 차례 폐 이식을 받았지만 합병증이 이어지며 3년 넘게 병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최근엔 임종에 대비할 정도로 쇠약해지고 있다. 그 사이 가족에겐 치료비로 7억~8억원의 빚이 쌓였다.

그래도 은주씨는 삶의 끈을 붙잡고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희주씨는 "동생이 팔순 노모를 보러 고향에 내려가는 희망만 갖고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 앰뷸런스 타고 같이 가자고 말하니 고개를 끄덕이더라"면서 눈물을 흘렸다.

목 절개로 말을 할 수 없어 병상에 누워 손글씨로 소통하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안은주씨. 사진은 2019년 말 모습. 사진 환경보건시민센터

목 절개로 말을 할 수 없어 병상에 누워 손글씨로 소통하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안은주씨. 사진은 2019년 말 모습. 사진 환경보건시민센터

끝 없는 치료의 터널…빚더미 빠진 피해자들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원인이 확인된지 11년만에 첫 합의를 앞두고 있다. 조정위는 중증 피해자에 최대 4억8000만원, 사망자에 최대 4억을 지급하는 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조정안이 피해자가 이어온 싸움의 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미 1700여명이 병마와 싸우다 세상을 떠났고, 나머지 피해자와 가족은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그 뒤엔 끝없는 치료에 지친 일상과 부채만 남았다. 2년 전 중증 폐질환에 걸린 부인을 잃은 유족 김태종씨는 "그간 많은 이의 가정 파탄과 수많은 빚은 도대체 누가 책임질거냐"고 울분을 토했다.

비교적 경증인 피해자나 사망자 유족도 크게 다를 건 없다. 조정안에 따른 지원금이 들어온다해도 지금껏 쌓인 아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 중증, 경증을 가리지 않고 피해자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치료의 터널을 계속 걸어야 한다. 이들이 "조정안에 향후 치료비 전액 보장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가습기 살균제 제품들이 놓여있는 모습. 편광현 기자

가습기 살균제 제품들이 놓여있는 모습. 편광현 기자

채경선씨에게도 가습기 살균제는 끔찍한 악몽이다. 2009년부터 제품을 사용했다가 호흡기와 면역 체계에 문제가 생겨 꾸준히 병원을 찾는다. 남편과 자녀의 건강도 모두 악화됐다. 하지만 정부가 피해자로 인정한 것은 채씨 뿐이다. 채씨는 "지금 일도 못 하는데 원래 받던 연봉보다 더 많은 치료비가 나온다. 두 아이가 모두 폐렴 등을 앓고 있어 코로나19 시국에 학교 보내기도 겁난다"고 했다.

대선 후보도 무관심…"잊혀지는게 무섭다"

이들을 더 힘들게 하는 건 사회적 무관심이다. 주요 대선 후보 4명 모두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 대해 공식적으로 해결 의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국민들 기억 속에서도 참사 자체가 희미해져 간다.

부인과 장모가 숨진 유족 송기진씨는 "사망자가 수천명인 사건인데 조용히 묻혀가고 있다. 문재인 정부도 출범할 때는 다 해결한다 해놓고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참사를 알리려 1인 시위에 나섰다는 안희주씨는 "많은 사람들이 피해 보상을 받고 끝난 줄 알고 있다. 돈 몇푼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게 싫다"고 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정부·기업의 진정한 사과와 책임 인정도 남은 과제다. 채경선씨는 "조정안이 잘 나온다고 끝이 아니다. 기업의 이윤 추구로 시민이 죽는 일이 반복되지 않는 게 진정한 마무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관련기사

피해자 인정 심사 기다리는 3000명 

특히 피해자들은 정부가 문제 해결에 보다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정부가 조정위에 사회적 합의를 맡겨 두고 슬쩍 뒤로 물러났다고 보고 있다. 송기진씨는 "가습기 살균제 제품을 일일이 확인할 순 없었겠지만 독성물 관리라는 정부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길게는 몇년씩 걸리는 피해 인정 심사도 문제다. 현재 3000명 넘게 정부의 심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 형을 폐암으로 떠나보낸 김종제씨는 "돌아가신 형님이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된 건 맞다는데, 피해 여부는 아직도 심사 중"이라며 "제대로 된 장례는커녕 빚만 쌓이고 있다"고 털어놨다.

환경부 관계자는 "사망한 분들을 포함해 가습기 살균제와의 관련성을 심층 검토하면서 최대한 신속히 심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향후 조정안을 거부한 피해자에겐 정부가 구제 급여를 지급하는 등 지원을 이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