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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SOS 외면한 나라에 좌절…사채업자에 '나체영상' 보냈다

중앙일보

입력

"나체 영상을 찍어 보내라. 아니면 부모, 직장, 친구들에게 불법 사채 썼다고 알리겠다."
김윤나(가명·23)씨는 지난달 14일을 잊지 못한다. "그날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온라인 대출 중개 사이트 문의를 통해 알게 된 사채업자들은 알고 보니 불법 사채업자들이었다.

이들은 윤나씨에게 "이자 상환을 위한 추가 대출을 받고 싶으면 텔레그램 링크로 나체 영상을 찍어 보내라"고 독촉했다. 윤나씨는 "사채를 쓴 것도, 영상을 보낸 것도 후회되지만 앞선 신고에서 경찰과 금융감독원이 서로 미루는 상황을 겪으면서 좌절했다. 그때는 영상을 보내는 것 외에 탈출구가 없어 보였다"고 말했다.

 사채업자들은 가족, 친구들에게 영상 소유 사실을 알렸다. [김씨 아버지 제공]

사채업자들은 가족, 친구들에게 영상 소유 사실을 알렸다. [김씨 아버지 제공]

"정식 대부로 알았는데 연이율 3258% 불법 사채" 

윤나씨에 따르면 철거업을 하던 아버지는 4년 전 간경화 수술을 받았고, 2년 전 철거 현장에서 다리를 다쳤다. 이후 윤나씨 3남매를 포함한 5인 가족 생계가 당장 빠듯해졌다고 한다. 초등학생인 막냇동생을 제외한 모두가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다. 아버지의 부상 이후 가족 생활비를 책임지던 윤나씨는 "카드빚이 연체되기 시작했고, 과거 신용대출 이력으로 은행과 저축은행 등 대출이 막힌 상황에서 잠시 카드빚만 막을 생각으로 사채를 썼다"고 털어놓았다.

"불법 사채를 쓸 생각은 없었다"고 했지만, 정작 윤나씨에게 돈을 빌려준 이들은 40만원을 1주일 뒤 65만원으로 갚는 조건(연이율 3258%)을 제시한 불법 사채업자들이었다. 이들은 상환 예정시간에서 1시간 늦을 때마다 15만원의 이자를 부과했다. 이자를 못 갚으면 다른 업자를 소개해 추가 대출을 종용했다. 윤나씨의 대출 원금과 대출 이자는 매일매일 불어났다. 뒤늦게 불법임을 인지한 윤나씨는 직장 근처인 서울의 한 경찰서를 찾았다. 불법 사채 피해 신고를 하고 구제를 받기 위해서였다.

"관련 기관 서로 미루기 급급" 

윤나씨는 "한 곳에서라도 도음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싶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윤나씨는 "한 곳에서라도 도음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싶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경찰에서는 이체 내역, 업체 이름, 핸드폰 번호 등을 적어야 한다고 했다. 이체 내역 이외 비대면 대출을 받아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없고 이들이 대포폰을 쓰는 것 같다고 하니 금융감독원과 법률구조공단을 통한 구제절차를 설명해줬다."
윤나씨는 사건을 접수하지 못했지만, 경찰이 안내했듯 "금감원과 법률구조공단에 연락하면 해결될 거라 믿었다"고 했다. 이미 수백만원 넘게 법정이자 이상의 돈을 갚았기 때문에 더는 협박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 기대했다.

윤나씨에 따르면 금감원 관계자는 "불법 사채업체는 등록이 안 되어있기 때문에 당장 도울 수 있는 게 없으니 경찰에 신고하라"고 했다. 또 법률구조공단의 변호사는 "경찰이나 금감원에 신고하시고 구제를 받으시라"고 답했다. "'우리 기관이 처리할 일'이라고 적극적으로 나선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는 것이 윤나씨 주장이다.

"수사 권한 없어", "대리인 제도 연결" 

셔터스톡

셔터스톡

이에 대해 금감원 관계자는 "금감원은 수사나 조사 권한이 없다. 피해자가 수사 의뢰를 하고 법률구조공단 채무자 대리인 제도를 통해 최대한 빨리 도움받도록 안내해드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해명했다.

법률구조공단 관계자는 "불법 사채는 민사 문제로 저희는 경찰 신고와 무관하게 채무자 대리인 제도로 연결해 돕는다"면서 "피해 상담만 하고 채무자 대리인 제도를 이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고 했다.

윤나씨는 "답답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체 영상 요구에 응하는 것 외에 당장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 곳에서라도 도움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싶다"고 했다. 그렇게 텔레그램으로 업자들에게 영상을 보낸 뒤, 돌아온 협박의 강도와 횟수는 더 커졌다.

사채업자 "'n번방 사건' 아시냐" 

사채업자는 아버지 김씨에게 "'n번방 사건'아시냐"고 물으며 딸 영상을 갖고 있다"고 했다. [사진 연합뉴스TV]

사채업자는 아버지 김씨에게 "'n번방 사건'아시냐"고 물으며 딸 영상을 갖고 있다"고 했다. [사진 연합뉴스TV]

"김윤나씨 영상을 갖고 있습니다."
윤나씨 아버지 김모(50)씨는 스팸 문자라고 생각했다. "딸 친구들이 같은 문자를 받았다고 연락을 해오니 상황이 예사롭지 않은 것 같았다"고 했다. 4년 전 간경화 수술을 받고, 2년 전부터 일을 못 나가던 김씨는 딸이 불법 사채를 쓴 게 "일하다 다친 나 때문"이라고 자책했다.

지난 3월, 부상에서 회복한 뒤 2년 만에 다시 출근하게 된 날 김씨는 처음으로 사채업자들의 전화를 받았다. 김씨는 "딸이 40만원씩 두 번 대출했고 빚이 300만원이라는 전화를 받은 뒤 딸과 협의해 빚을 갚았다"고 했다. 김씨에 따르면 빚을 갚자 다른 사채업자들이 김씨 부녀에게 연락해 "우리도 받을 돈이 있다"고 주장했고 얼마 뒤 "딸의 영상을 갖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n번방 사건 아시냐'고 하더라. 영상을 빌미로 협박하며 '돈을 갚으라'고 요구했다. 법정이자 이상으로 빚을 다 갚았다고 따져도 소용없었다"는 것이 김씨의 주장이다.

김윤나씨 아버지는 "딸 신고에 아무도 나서주지 않아 일이 커진 것 같다"고 말했다. 여성국 기자

김윤나씨 아버지는 "딸 신고에 아무도 나서주지 않아 일이 커진 것 같다"고 말했다. 여성국 기자

김씨 부녀가 그동안 상환한 돈은 1000만원이 넘는다. 생계를 위해 정수기 회사에 취업한 김씨의 아내는 사채업자들의 협박 때문에 공황 장애가 왔다. 윤나씨 또한 영상 유출에 대한 공포와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 김씨는 "간경화 때문에 약을 먹어야 하는데 밥이 넘어가지 않아 약도 제대로 못 먹고 있다"면서 "내 잘못도 있지만, 딸이 신고했는데 아무도 나서주지 않아 이렇게 일이 커진 것 같아 야속하다"고 했다.

"조직 범죄 의심…대응할 시스템 갖춰야"

취재진이 김씨로부터 입수한 사채업자와의  통화 녹취에 따르면 업자들은 조직적으로 김씨 부녀에게 영상을 빌미로 돈을 요구했다. 영상을 갖고 있다고 문자를 보냈던 한 사채업자는 김씨에게 "누가 (영상을) 갖고 있는지 모르지만, 누군가 갖고 있으니까 (돈을 요구해) 똑같이 처리하면 된다더라"고 말했다.

불법 사채 피해자들을 돕는 이기동 한국금융범죄연구센터 소장. 우상조 기자

불법 사채 피해자들을 돕는 이기동 한국금융범죄연구센터 소장. 우상조 기자

김씨 부녀의 사연을 듣고 이들을 돕는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 이기동 소장은 "과거 보이스피싱 범죄조직이 최근 불법 사채 쪽으로 넘어갔고 대포폰, 대포통장으로 조직적으로 영업하면서 수사망을 피하고 있다"면서 "지금도 수사 기관을 찾았다가 구제받지 못한 피해자들의 도움 요청이 계속되고 있다. 책임 있는 기관들이 서로 미루지 말고 적극적으로 협력해 대응할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윤나씨는 지난달 말 서울 종암경찰서에 영상 협박 사건을 접수했다. 경찰 관계자는 "사건이 접수돼 일단 고소인 조사를 마친 상태다. 영상을 빌미로 돈이 오간 정황이 있어 보인다. 절차에 따라 수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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