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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

시동 걸린 차별금지법, 함께 가야 멀리 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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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포괄적 차별금지법 찬반 논쟁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사회적 논의와 합의를 핑계로 인권을 나중으로 미루고, 민주주의를 침식시키고 있다. 평등의 원칙,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시민들을 차별과 혐오에 방치해두는 정치를 ‘나중에’가 아니라 ‘바로 지금’ 끝내야 한다.”

지난달 28일 국회도서관 강당. 사회단체 142곳이 참여하고 있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차제연)가 주최한 ‘차별금지/평등법 제정을 위한 비상시국선언’이 있었다.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와 정혜실 차별금지법제정이주연대 활동가가 이런 내용의 선언문을 낭독했다. 여기에 800여 명의 사회 원로와 각계 인사가 서명했다. 명단을 훑어보니 주로 진보 인사들이었다.

국회, 차별금지법 공청회 열기로
참여정부 국정과제로 2007년 시작
동성애 이슈 등으로 번번이 좌절

“평등이 밥”‘바로 지금’ 제정요구
재계 “학력·고용 차별금지 불합리”
보수의 무관심, 진보 독선도 문제

“선거 핑계 대는 정치권 악습 끊어야”

지난달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연대 주최로 열린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비상시국선언’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지난달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연대 주최로 열린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비상시국선언’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소성욱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집행위원은 “시민들이 나서서 평등의 밥상 다 차려놨다. 시민들이 먼저 용기를 냈다. 이 평등과 용기, 거저 드릴 테니 국회가 가져가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현재 단식 18일째인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는 “선거 핑계를 대는 악습을 끊어야 한다. 민주주의 꽃이라는 선거가 우리의 존엄과 평등을 부정하고 우리의 권리를 유예하는 이유가 된다면 선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정치권을 비판했다.

차별금지법은 노무현 정부의 국정과제였고 2007년 법무부가 ‘헌법상 평등의 원칙을 실현하는 최초의 기본법’이라며 거창하게 입법예고했다. 하지만 보수 기독교계와 재계의 반대로 성적 지향 등 7개의 차별금지 사유가 삭제된 법안을 정부가 발의했고, 이번엔 법이 누더기가 됐다는 사회단체의 비판을 넘지 못했다. 18~19대 국회에서도 법안이 발의됐지만 제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2020년 21대 국회에서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차별금지법을 발의했고, 지난해 6월 10만인 국민동의청원이 성립돼 국회에서 논의를 하게 됐다. 시민이 다 차린 밥상이라는 말이 나온 이유다. 이상민·박주민·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각각 평등법을 발의했다. 윤호중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대선이 끝난 지난 3월 평등법·차별금지법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국회 법사위는 지난달 27일 공청회 개최를 결정했다. 하지만 시기와 토론자는 정하지 않았다.

15년 표류했지만 찬성 여론 많아

이날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씨도 참석했다. 그는 “여러분 힘내세요. 함께 하겠다”고 응원했다. [연합뉴스]

이날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씨도 참석했다. 그는 “여러분 힘내세요. 함께 하겠다”고 응원했다. [연합뉴스]

15년간 표류했지만 차별금지법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는 찬성이 훨씬 더 많다. 한데 법안 내용은 의외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법은 국가가 차별금지 정책을 만들고 법과 제도를 개선하는 연구를 하도록 했다. 차별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다. 현재 국가인권위원회는 시정권고만 내릴 수 있지만,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시정명령을 내릴 수 있고 악의적인 차별로 손해가 발생하면 배상 책임도 물린다. 차별 여부의 판단은 국가인권위원회나 법원과 같은 독립기구가 한다. 교육·고용·서비스와 재화의 이용과 같은 공식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반복적인 차별행위가 규제대상이다. 일상의 모든 차별을 규제하는 건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날 국회 정문 앞 도보에선 차별금지법 찬반 단체의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평등이 밥이다”고 적힌 플래카드 옆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18일째 단식 중인 활동가와 이들을 응원하는 단체들의 천막이 있었고 그 주변에선 법에 반대하는 1인 시위가 이어졌다. 종교가 없다고 밝힌 박모(45)씨는 ‘학교에서 동성애 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하게 하는 차별금지법 제정 STOP’이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학생들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50대 여성 기독교인은 동성애에 반대하는 이유를 나열했다. 표현이 거칠어서 지면에 옮기지는 않겠다. 장예정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집행위원장은 “형사처벌 규정이 없는데도 과잉처벌을 조장한다는 등 가짜뉴스만 보고 판단하시는 분이 많다”고 말했다.

반대측 “자유민주주의 반하는 독재 발상”

국회 정문 앞에 쌓인 차별금지법 반대단체의 손팻말. 서경호 기자

국회 정문 앞에 쌓인 차별금지법 반대단체의 손팻말. 서경호 기자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502개 단체가 모인 ‘진정한 평등을 바라며 나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국민연합(진평연)’은 최근 성명서에서 “특정 주장을 강요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혐오와 차별로 간주하여 법적 제재를 가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지극히 독재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원성웅 진평연 상임대표(목사)는 이 단체 홈페이지에서 “문제의 법안들은 대부분 ‘평등’을 지나치게 강조하므로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과오를 범하고 있고, 평등을 이루기 위해 도리어 ‘역차별’의 결과를 만들고 있는 사려 깊지 못한 법안들”이라고 평가했다.

경제계는 사회 전 분야에 걸친 획일적 규제 입법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한다. 4개 법안이 고용과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광범위한 사유로 차별을 금지하고 있어 헌법이 규정한 자유시장 경제질서(119조)와 기업의 자율경영(126조)을 제약하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크다고 본다.

특히 법안이 성별 등 20개가 넘는 차별금지 사유를 적시하고 있는데, 학력·고용형태를 차별사유로 정한 것은 기업의 인력운용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악영향만 초래할 것이라고 봤다. ‘학력’은 성별 등과 달리, 개인의 노력과 선택이 반영된 능력 지표로 사회적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는데, 이를 채용 과정에서 활용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경총 “기업 자율경영 제약 우려”  

홍종선 한국경영자총협회 근로기준정책팀장은 “차별금지법을 이미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는 국가에서도 고용형태를 차별사유로 정하는 입법례는 찾아보기 힘들다”며 “기간제법이나 파견법이 차별 비교대상을 명확히 설정하고 있는 것과 달리, 이 법안은 비교대상을 명확하게 정하지 않고 있어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 입증책임을 현행 민사소송법의 일반원칙과 다르게 차별을 주장하는 자의 상대방이 입증하도록 하고 있는 점, 차별은 개인적·전속적(專屬的) 성격이 강한데 제3자나 단체에게도 차별시정신청권을 인정한 점 등도 문제로 꼽았다.

법 제정을 둘러싼 가장 큰 갈등은 역시 동성애 이슈다. 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는 “차별금지법을 조롱하고 저주를 퍼붓는 분들에게 말하고 싶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살아볼 용기를 내보시라. 서로 돌보는 경험, 시민적 덕성의 경험을 만들어보시라”고 말했다.

“차별 옹호자 말까지 들어야 하나” 주장도

동성애 반대측은 합리적 토론의 상대로 여기지도 않는다.

“차별금지법의 원칙은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는 것이어야 한다. 사실은 애초에 차별금지라는 헌법적 명령을 법제화하려는 공론의 장에서, 그 기본원칙을 거슬러 노골적이고 조직적으로 차별하는 사람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오류다.”(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저자는 “정부와 국회가 차별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온 것이 지금까지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못한 근본원인”이라며 “집단 간의 합의가 아니라 인권과 정의의 원칙이 중심이 돼야 한다”고 썼다. 아무리 거친 반대가 있다고 해도 차별을 없애기 위해 차별하고 배제해도 되는가. 어려운 문제다.

보수, 더 관심 갖고 함께 논의해야

차별금지법이 진보만의 이슈가 된 데엔 보수의 잘못도 있다.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논의해서 법안을 다듬는 노력을 해야 한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해 11월 ‘유럽 차별금지법제와 시사점’ 보고서에서 “헌법의 중요한 이념인 자유민주주의는 다수 또는 과반의 자유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의 자유가 가능할 때 자유민주주의가 충실히 구현된다고 할 수 있다”며 “소수자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며 소수의 인권을 보호하고 다수의 횡포가 지배하지 못하는 사회가 되기 위한 노력도 중요한 자유민주주의의 한 이념”이라고 적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자료집엔 이런 대목이 있다. “검수완박 강행처리 장면을 목격한 시민들은 더불어민주당이 결단하면 할 수 있는 권력과 책임 있는 위치임을 확인했다.(중략)이제 그 권력으로 차별금지법을 신속하게 만들어낼 시간이다.” 선언문에서 이제까지 차별금지법이 무산된 이유로 ‘반인권세력’을 지목한 부분도 걸린다. 반대한다고, 혹은 적극 나서지 않는다고 반인권 세력으로 몰아붙여선 곤란하다. ‘혼자 가는 것보다 함께 가야 멀리 간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공감대를 넓혀야 힘이 있다.

독일 시인·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가장 곤궁한 자의 외침에 귀를 막는다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도 알아듣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지금 가장 곤궁한 자는 누구일까. 단식 중인 인권활동가 미류가 퀭하지만 맑은 눈으로 한 말이 자꾸 생각난다. “양쪽 공방만 단순 전달하는 언론도 잘못이다. 뭐가 문제인지 판단해서 같이 고민해보자고 던지는 보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