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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인구 70만의 섬나라, 어떻게 미중 패권경쟁 무대가 되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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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솔로몬제도의 제일 큰 섬 과달카날에 무슨 일이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과달카날 전투는 수없이 펼쳐진 2차 대전 전투 중에서도 가장 격렬하고 처절했던 전투의 하나로 꼽힌다. 미드웨이 해전 직후인 1942년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남태평양의 과달카날 섬에서 육해공을 망라해 펼쳐진 이 싸움으로 2차 대전의 전세가 바뀌었고, 결과적으로 세계사의 물줄기가 방향을 틀었다. 미국은 이 전투로 태평양의 제해권을 잡았고, 일본은 미국의 서진(西進)을 막아내지 못하고 고전하다 항복했다. 2만명 넘는 일본군 전사자 중에는 고립 상황에서 보급이 끊겨 아사한 병사가 많은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은 왜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고 이 작은 섬을 지키려 옥쇄(玉碎)작전까지 펼친 것일까. 지도를 보면 과달카날 섬이 갖는 전략적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호주 동북쪽 2000㎞에 위치한 이 섬은 미국과 호주를 잇는 항로상에 있다. 이 섬을 장악하면 미군의 보급로를 끊고 서진을 봉쇄해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2차 대전의 미·일 격전장에서 80년만에 미·중 격돌장으로
미국-호주 항로에 위치, 괌 배후상에 입지한 전략적 요충지
중국이 차이나 머니 앞세워 미국 관심 소홀한 틈 파고 들어
제3 도련 구축하고 태평양 양분지계 본격화 위한 교두보 마련

마나세 소가바레 솔로몬제도 총리가 지난 2019년 10월 베이징을 방문해 리커창 중국 총리와 함께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마나세 소가바레 솔로몬제도 총리가 지난 2019년 10월 베이징을 방문해 리커창 중국 총리와 함께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로부터 꼭 80년 만에 이 섬이 다시 세계 패권 경쟁의 무대로 떠올랐다. 건곤일척의 공방전을 벌였던 미국과 일본이 한편에 서서 뒤늦게 남태평양에 뛰어든 중국과 싸우는 것이 달라진 점이다. 과달카날은 영국령에서 독립국이 된 솔로몬제도에서 가장 큰 섬이고 수도 호니아라도 과달카날에 속한다. 인구 70만에 못 미치는 소국이지만 솔로몬제도의 전략적 중요성은 8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불변의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그 가치에 주목한 중국이 솔로몬제도를 태평양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 위한 공세에 나섰다.

지난 3월 하순 온라인 SNS를 통해 중국과 솔로몬제도가 합의했다는 안전보장협장(Security Pact)의 내용 일부가 공개돼 서방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질서와 중국 교민 안전 유지라는 전제조건이 붙긴 했지만 중국이 군대와 무장경찰을 파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솔로몬 항구에 중국 함정을 정박할 수 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오랫동안 남태평양 도서국들을 자국 세력권으로 생각해 왔던 미국과 호주의 허를 찌르는 내용들이었다. 중국이 마음만 먹으면  솔로몬 내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고 항공모함을 기항지로 사용할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중국의 항공모함이 솔로몬제도로 나오는 건 근해방어의 작전 개념에서 벗어나 원양(遠洋)해군으로 변신함을 의미한다.

부랴부랴 미국과 호주는 솔로몬 정부에 협정 체결을 보류하라는 압박을 가했다. 호주 태평양장관이 솔로몬으로 급파됐다. 미국은 ‘아시아 차르’라 불리는 커트 캠벨 백악관 인도태평양 조정관을 파견한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29년 전 철수한 주(駐)솔로몬 대사관을 재개설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일본이 가세했다. 일본은 태평양 도서국가들에 대한 최대 원조공여국이다. 이와 별도로 미·호·일과 뉴질랜드 등 4개국은 따로 하와이에서 고위급 회담을 열고 우려를 표명했다. 이처럼 안보협정 저지를 위한 전방위적 외교전에도 불구하고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과 마넬레 솔로몬 외무장관은 지난달 19일 협정을 체결했다. 캠벨 출발 하루 전 기습적으로 서명일자를 앞당긴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솔로몬제도. 그래픽= 전유진 yuki@joongang.co.kr

솔로몬제도. 그래픽= 전유진 yuki@joongang.co.kr

솔로몬은 군대가 없는 나라다. 자국 경찰력만으로 막기 힘든 소요사태나 대형 재난이 일어나면 호주 군대의 힘을 빌렸는데 이제 그 대상을 중국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솔로몬은 주권 사항이라 설명하며, 중국은 “제3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하지만 외부 세계는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다. 치안·재난 대응을 위한 것이면 멀리 있는 중국이 아니라 호주·뉴질랜드 등 역내 국가의 도움을 받는 게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안보협정 체결로 전통적 친미, 친호 노선에서 친중 국가로 변모했다.

어떻게 이런 반전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3년 전 촬영된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와 마나세 소가바레 솔로몬 총리의 사진이 그 내막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소가바레는 2019년 10월 베이징을 방문했다. 총리직을 오르락내리락 하던 정객 소가바레가 네번째 총리에 취임한 뒤 대만과의 국교를 끊고 중국과 수교한 직후였다. 시진핑 국가주석과 리커창 총리는 정상회담에서 두둑한 원조를 약속했다. 솔로몬은 인구 70만에 국토가 여러 개의 섬으로 나뉘어져 있어 1차 산업 이외에 이렇다 할 산업기반이 없어 국가 경제는 외국 원조에 의지해 왔다. 이런 점을 파고든 중국의 외교적 성과였지만, 중국의 대만고립 작전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어서 당시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배경에 태평양 교두보를 마련하려는 포석이 깔려 있었음을 미국 등 외부 세계가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더구나 이 모든 일들은 미국이 남태평양에서 잠시 관심을 소홀히 한 사이에 일어났다.

태평양 진출은 중국의 오랜 숙원이자 당면한 국가전략 목표이기도 하다. 중국은 그 꿈을 숨기지 않는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집권 초 미국을 방문해 “태평양은 미·중 양국을 모두 포용할 만큼 충분히 넓은 공간”이라고 말했다. 티모시 키팅 전 미 해군 태평양사령관은 “하와이를 경계로 미국이 동쪽, 중국이 서쪽을 관리하자”는 중국 해군 간부의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고 의회에서 증언하기도 했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와 다를 게 없는 ‘아태양분지계(亞太兩分之計)’다. 솔로몬과의 안보협정이 그 원대한 꿈의 서막이라고 하면 침소봉대일까.

윤석준

윤석준

중국 해군 전략과 전력을 전문적으로 연구해온 윤석준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중국의 입장에서 신의 한 수를 둔 것”이라 표현했다. 윤 위원은 해군 함장 재직 때 솔로몬제도에 입항한 경험이 있다.

중국이 솔로몬에 군사 기지를 갖게 되면 군사전략적으로 어떤 이점이 있나.
“이는 다분히 중국의 태평양 진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남태평양에 상주군이 없는데 중국이 거점을 확보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호주에 근접한 곳이고, 미군 기지가 있는 괌의 배후이기도 하다. 특히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남중국해와 동중국해, 대만과 일본, 한국에 집중되는 틈새를 파고 든 모양새다.”
중국이 어떻게 그 틈새를 파고들었을까.
“10여년 전 해군 함장 때 수도 호니아라에 입항한 적이 있다. 현지인들은 과달카날 해전의 영향으로 미국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었고, 당시 침몰된 함정때문에 산호초가 자라지 못해 관광이 안된다는 불만도 있었다. 또 호주가 기득권을 지키려고 다른 나라의 투자를 막고 있다며 한국의 투자를 기대하기도 했다. 이런 틈을 비집고 중국이 접근한 것으로 본다.”
중국 해군 전략은 ‘접근거부’를 축으로 하여 제1, 제2 도련(島鏈·Island Chain)을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있다. 솔로몬제도는 그 선 밖에 있는데 기존의 해군 전략을 수정한 것인가.
“1989년에 나온 중국 해군 책자는 제1, 제2도련만 언급하였으나, 2014년 림팩(환태평양) 훈련 이후부터 비공식적으로 제3도련을 설정한 것으로 안다. 해군력이 원해로 나가 장기작전을 펼치는 체제다. 제3도련 구축을 위한 전초점이 남태평양이라고 본다. 중국은 이미 미국에게 태평양을 반반씩 관리하자고 제안했다.”
미국의 반발을 무릅쓰고 중국이 정말 군대를 보내려고 할까. 충돌 위험까지 불사하면서….
“중국은 이미 솔로몬제도에 치안지원을 명목으로 무장경찰과 해경을 보내 대테러 진압 등 훈련을 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와 있다. 미국·호주와 뉴질랜드가 반발을 하겠으나 현재로선 뾰족한 방안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얼마 전에는 중국이 원해 해군기동전단을 감시하던 호주 공군 해상초계기 조종사에 레이저빔을 투사하는 공격성을 보인 일도 있었다.”

중국의 팽창전략이 가속화할수록 태평양의 파고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솔로몬은 한국과는 6300㎞ 떨어진 먼 나라다. 지금 이 나라를 둘러싼 합종연횡의 세력싸움이 과연 남의 일로만 끝나는 것일까.

이달 하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한국·일본 순방이 예정되어 있다. 이에 맞춰 호주·영국·미국의 안보협의체인 오커스(AUKUS) 확대 등 중국의 태평양 진출에 대응하는 협력방안을 논의할 것이란 보도가 나왔다. 태평양 연안국 한국에도 쉼 없이 파고가 밀려든다는 이야기다. 우크라니아 사태에서 보듯 지구촌의 모든 일들이 한국의 국익과 얽히고 국가 위상과 관련되는 시대를 맞고 있다. 한국도 솔로몬에서 개발원조(ODA) 사업을 펼치고 있는 만큼 적극적 의지와 관심을 갖고 국제사회에서 제 역할을 찾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