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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파일] 북한산에서, 당선인에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80호 35면

김홍준 사회부문 기자

김홍준 사회부문 기자

여기는 북한산. 종이지도를 펼칩니다. 아내가 물어봅니다. 왜 갖고 왔냐고요. 해발 160m, 저지대에 그려진 등고선처럼 길게 답합니다. 우리 앞에 펼쳐진 동서남북과 종이지도 위에 펼쳐진 동서남북을 알아야 한다고요. 그래야 나는 어디에서 왔고,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고도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덧붙일 말이 아닙니다. 지도의 핵심, 즉 존재 이유입니다.

물어보겠습니다. 1500만 등산인(통계청 추산) 여러분, 종이지도를 갖고 다니십니까. 등산인 중 한 명인 아내는 시큰둥해 합니다.

맞습니다. 이 시대, 종이지도는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스마트워치에 지도가 다 나오는데, 필요가 없겠지요. 종이지도는 골치 아프게도 합니다. 매듭법보다 어려운 최상위 난도의 과목이라고, ‘최종학력 등산학교’ 졸업자들이 말합니다. 어떤 이는 배워도 배워도 실습 현장에 나가면 지도가 백지로 보인다는 말도 합니다.

지난 12일 북한산 의상봉 앞에서 한 등산객이 지도를 들고 지형을 살펴보고 있다. 김홍준 기자

지난 12일 북한산 의상봉 앞에서 한 등산객이 지도를 들고 지형을 살펴보고 있다. 김홍준 기자

최선웅 한국지도제작연구소 대표가 말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사회과 단원에 나오는 지도에 관한 지식만 알아도 충분한데, 우리는 어려워해서, 필요 없을 것 같아서 종이지도를 너무 멀리한다”라고요. 그러면서 “아무리 스마트하다고 해도, 배터리가 떨어지면 무용지물 아니냐”고 합니다. 디지털 시대에도 종이지도는 필요하다는 말인데, 더 구체적으로 들어갑니다. 최 대표는 “종이지도는 독도법을 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주기는 하나, 지형에 대한 인지도를 높여 준다”며 “반면 디지털지도는 자신의 위치가 자동으로 뜨고 목표지점을 검색하면 되니 돌아서면 길을 잊어버린다”고 했습니다. 그는 “넓은 지역에서 세밀한 지역으로 시선을 옮겨야 그 지역을 이해하는데, 스마트폰 앱은 넓은 시선으로 살펴보기 힘들다”고도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제주관광공사에서 우편발송해 주는 종이지도가 ‘없어서 못 보낼’ 정도입니다. 지난 14일 제주관광공사 홈페이지에는 ‘처리 가능한 발송 수량을 초과하여 금일 신청이 마감되었습니다’라는 안내가 떴습니다. 제주관광공사 관계자는 “2017년 우편발송 서비스를 시작했고, 2018년 5만1558명에게 보냈는데, 지난해에는 코로나19 상황에도 6만1580명에게 지도를 보냈다”고 밝혔습니다. 전주·안동시 등에서 내놓은 종이지도도 인기입니다. 한물갔다는 종이지도의 부활일까요. 제주에서 만난 20대 여행자는 종이지도를 예찬했습니다. “대략적이라도 행선지를 파악하기 쉽고, 이런저런 정보를 귀퉁이에 메모할 수도 있고 … 방문한 곳에 스탬프를 찍는 재미도 쏠쏠하더라.”

누군가에게 물어보면 길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지도를 보면 다양한 길이 보입니다. 최 대표는 “길에 삶이 묻어나듯, 지도에도 세상살이가 펼쳐진다”고 말합니다. 수많은 역사의 결정적 장면도 지도를 펼쳐 놓고 벌어졌습니다. 이처럼 지도는 한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있는 북한산을,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좋아하는 산으로 꼽았습니다. 20대 대통령이라는 대한민국의 새 시대, 새 지도가 그려집니다. 잠깐 멈춰 서서 대한민국이, 국민이, 당선인 본인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고, 어떻게 어디로 갈 것인지 가늠해 봐야 할 것입니다.

지나가는 등산객이 물어봅니다.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어디로 가면 되는가.” 그새 지도 좀 볼 줄 알게 된 아내가 자신 있게 답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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