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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어린이에게 부끄러운 대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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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여성국 기자 중앙일보 기자
여성국 탐사팀 기자

여성국 탐사팀 기자

퇴근길, 집 근처 잔디 공터에서 열 살 남짓 어린이들이 남녀 섞여 축구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대선 전, 공터 옆 선거 벽보가 막 붙었을 때 그걸 본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걸 우연히 들었다. “과학 강국이 되려면 저 아저씨가 되면 좋겠다” “저 아줌마가 토론에서 말을 제일 잘해” “근데 1, 2번 중에서 될 거래” 아이들 토의를 엿듣다 문득 어린이를 위한 논의와 공약이 얼마나 있었나 궁금해졌다.

이대남·이대녀가 호명되는 사이 어린이는 대선 후보 손을 잡거나, 어퍼컷을 함께 연출하는 대상으로 소비됐다. 장애인·노인 등 사회적 약자 논의도 부족했지만 표심 눈치 덕인지 어린이보단 나았던 것 같다. 어린이는 투표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이는 그 시기를 힘껏 살아가는 존재임에도 늘 미숙한 존재로 여겨진다. 돌봄 서비스 강화, 아동학대 방지는 어린이 공약이지만 부모 공약에 가깝다. 어린이는 어떤 공약을 바랄까. 뛰놀 수 있는 시ㆍ공간이 더 많아지길, 지역과 아파트와 무관하게 재밌는 놀이터나 도서관을 마음껏 이용하길 바라지 않을까. 기후 위기로 지구가 아플 테니 어린이가 노인이 될 때까지 지구가 무사할 수 있는 공약도 바랄 것 같다.

지난 3일 충남 공주 유세에서 어린이들과 기념촬영을 하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연합뉴스]

지난 3일 충남 공주 유세에서 어린이들과 기념촬영을 하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연합뉴스]

이번 ‘비호감 대선’에서 어른들은 지역과 성별로 편을 가르고, 각종 비리 의혹에 연루되고, 욕설 녹취가 퍼지는 등 어린이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줬다. 친구를 “빌라거지, 전세거지”라 부르며 놀리고 편 가르는 건 요즘 애들 모습이 아닌 요즘 어른 모습의 재현일 뿐이다. 김소영 작가의 책 『어린이라는 세계』에서는 독서교실 선생님인 저자가 아이들과 책을 읽는 대목이 있다. 장애 어린이가 보조 기구를 활용해 운동 경기를 하는 등 다양한 신체를 보여주는 그림책을 아이들과 읽으며 주제를 묻는다. “서로 몸이 달라도 무시하지 말자”는 답을 들은 저자는 칠판에 ‘서로 몸이 달라도 ~자’라 쓴다. 아이는 ‘같이 놀자, 반겨주자’ 는 말을 채운다. 같이 놀고 반겨준다는 건 존중보다 깊은 환대다.

“유치원에서 배운 것만 잘 지켜도 세상은 더 나아진다”는 말이 있다. ‘욕심부리지 마라, 정정당당하라, 친구 마음도 내 마음과 똑같다’는 건 우리가 어린 시절 배우는 인생의 태도들이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책이 30여년간 전 세계 스테디셀러인 건 모두가 어린 시절 배운 걸 잊은 듯 살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를 조롱하고 편 가르고 싶을 때, 차별·배제하고 싶을 때, 유혹이 다가와 ‘내로남불’이 하고 싶어질 때면 어린 시절 배운 걸 떠올려보자. 또 서로 몸과 마음이 달라도 같이 놀고 반겨주자. 어린이의 태도를 잊지 않는 어른, 어린이의 존재를 잊지 않는 어른들이 많아질 때 어린이가 마음 놓고 살아가는 세상이 될 것이다. 어린이에게 부끄러운 선거는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