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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대통령 당선인이 멀리해야 할 ‘공신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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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정민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민 논설실장

이정민 논설실장

“선거 기간의 흥분은 사라졌고, 그저 내게 주어진 책임감이라는 짐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즉시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와 짐을 함께 질 다른 훌륭한 사람들이 필요했다.”

미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대통령 당선의 순간을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도리스 컨스 굿윈이 쓴 『권력의 조건(원제 Team of Rivals)』에 의하면 링컨은 당선이 확정된 밤 곧바로 내각 구상에 들어가 ‘다음날 해가 지기 전’에 7인의 명단을 작성했다고 한다. 엄청난 당내 반발에 부닥쳤지만 7인은 결국 국무·재무·우정장관 등 요직에 기용된다.

정적과 적수로 드림팀 만든 링컨
남북 분단 막고 노예제도 폐지
승자독식 진영정치 막으려면
반대 세력 포용한 내각 짜야

참모들이 반대하고 나선 까닭은 이들이 ▶대선후보 공천을 놓고 경쟁(슈어드, 체이스, 베이츠)했거나 ▶대척점에 있는 민주당 출신(블레어, 웰스, 저드)이거나 ▶공화당 내 다른 계파(테이턴)여서다. 캠프 출신 선거 공신들을 물리치고 정적과 적수들로 내각을 구성하겠다니 누가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겠나. 게다가 ‘3류 변호사’ ‘켄터키 촌뜨기’라고 링컨을 조롱하던 이들 아닌가.

살기등등한 공포와 증오 속에 치러진 대선(1860년)이었다. 노예제를 둘러싼 극한 대립으로 당시 미합중국은 갈가리 찢겼다. 집권당이던 민주당은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남부와 북부에서 각각 독자 후보가 출마했을 정도다. 링컨이 당선되자 남부의 급진주의자들은 링컨 인형 화형식으로 적개심을 표출했을 정도로 준내전 상태였다.

링컨은 확증편향의 동조자끼리 똘똘 뭉치는 팬덤정치에 순응하지 않았다.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라는 적대시 사고, 승자독식의 분열주의에 반항했다. 여기서 시대를 꿰뚫는 통찰력 있는 지도자, 담대한 용기를 지닌 위인의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링컨은 노예제에 반대했지만 그 자체를 수단화하지 않았다. 정치도구로 삼지 않았단 얘기다. 그는 노예해방 구호만을 앞세우다 국토가 남북으로 양분되는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올까 경계했다. 그리되면 노예제 폐지는 요원해지고, 나라는 다시 열강의 먹잇감이 될 것이기 때문에 연방의 유지가 최우선 과제가 돼야 한다고 믿었다. 연방을 지키려면 국민을 한데 모아야 하고, 그러자면 좋든 싫든 적수와 정적까지 껴안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노예를 해방시키지 않고 연방을 수호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노예를 해방시켜야 연방을 수호할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할 것이며, 일부 노예만 해방시키고 나머지를 그대로 둬야 연방을 수호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

링컨의 연방 유지에 대한 신념과 철학, 절박한 호소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미국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두 동강 난 분단국가 신세가 됐을지 모른다. 세계의 부러움을 사는 초강대국으로의 도약은 어림없었으리라. 라이벌이더라도 실력 있는 인물을 찾아내 기용한 최고의 링컨 내각이 있었기에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노예제 폐지라는 시대정신을 실현할 수 있었다.

전쟁 같은 선거가 끝났다. 전쟁하지 말자고 고안한 게 선거제도인데, 이번 대선은 혐오와 저주의 무한 복제로 전투하듯 치러졌다. 괴물, 사기꾼, 전과자,감옥, 버르장머리 같은 말이 선거판을 물들였다. 부끄러운 일이다. 난장판 대선의 1차적 책임은 끼리끼리 나눠먹고 진영 갈라치기로 분열을 조장해 온 문재인 정권의 탐욕적 패권주의에 있다. 적폐청산을 정적 죽이기 방편으로 이용하고, 자기 진영은 어떤 불의와 위법을 저질러도 감싸고 용서해 주는 위선과 탐욕의 정치가 거센 정권교체 요구의 부메랑이 돼 되돌아왔다.

오늘 국민의 선택을 받은 대통령 당선인 앞엔 온갖 청구서가 날아들 터다. 그러나 청구서의 내용이 무엇이든 당선인이 매진해야 할 목표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전진을 멈출 수 없으며 ▶우리 아이들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리게 해줘야 한다는 명제다. 그 무엇도 이 명료한 사명보다 앞에 놓일 수 없다. 그러려면 뒤틀린 진영정치의 질곡에서 벗어나 분열의 확대재생산 구조부터 털어버려야 한다. 승리감에 가슴 벅찬 당선 첫날, 링컨이 밤새워 고뇌했던 ‘어떻게 분열을 막을 것인가’란 과제는 오늘 20대 대선의 승자가 된 당선인 앞에 놓인 숙제이기도 하다.

굳이 먼 나라 사례를 들 것도 없다. 앞선 정권을 보라. 어깨 우쭐해 선거 민의를 곡해하고 캠코더(캠프·코드·더불어민주당), 유시민(유명 대학·시민단체·민주당 보은),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출신), 강부자(강남·부동산·부자), 성시경(성균관대·고시·경기고) 내각과 코드·수첩·회전문 인사로 이룬 성과가 무엇인가. 전리품 배분하듯 자리와 이권을 나눈 이익 공동체의 말로는 실패한 대통령이란 주홍글씨뿐 아닌가.

1987년 민주화 이후로만 쳐도 벌써 여덟 번째 대통령이다. 이 불행한 역사의 무한 반복을 멈출 때가 됐다. 링컨이 극단적인 노예 해방론자를 배제한 모든 세력을 포용했듯, 반대파와 라이벌을 아우른 드림내각의 탄생을 기대해 본다. 대통령 당선인은 자신에게 투표하지 않은 반대세력의 요구에 먼저 귀 기울이고, 공신록을 가장 멀리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5년 뒤 하산길이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