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 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 국가이다.” 이건 ‘사회주의 지상낙원’의 헌법 1조 문장이다. ‘사회주의’는 북한 헌법에 35회나 등장한다. 그런데 ‘사회주의’의 대척어인 ‘자본주의’는 남북한 헌법을 다 들춰봐도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유는 명쾌할 것이니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 따라 생겨났고 규정 없이도 작동하는 자연스런 체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도 최소한의 제도 개입만 요구할 따름이다. 이에 비해 사회주의는 지속적 통제가 필요하다. 그래서 자본주의국가 대한민국의 헌법은 임시정부 시절부터 간단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자본주의는 법전 아닌 역사책이 설명한다. 부르주아지가 유럽 사회의 절대 지배층이 된 것은 19세기다. 이전의 지배계급 귀족은 신분을 세습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세습되지 않는 신분이다. 누구나 부르주아지가 될 수 있고 밀려날 수도 있다. 그 신분 유지의 도구는 자본이지만 자본 확보에는 분석·예측·계획 능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부르주아지에게 가장 중요한 상속 도구는 교육이었다.
일제시대에 도입된 대학교육 체제
국민을 도구로 보는 교육관이 근간
100년간 이어온 문·이과 칸막이
국민 기본권 제약한 폭력적 장치
대학은 중세에 생겨났다가 한량집합소로 전락했던 교육기관이다. 대학이 재정비된 곳은 19세기 초 독일이다. 나폴레옹에게 수모를 당한 후 교육에 대한 자각이 일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아카데미와 에꼴에 맞서는 대학 교육의 공급자는 국가이고, 수요층은 압도적으로 부르주아지였다. 19세기 후반 대학을 한번 더 변화시킨 곳은 미국이었다. 경영학을 대학 전공으로 채택하여 노골적으로 자신의 자본주의 정체성을 보인 국가다.
미국은 대학 위에 대학원이라는 지식생산 기관을 추가해 만들었다. 대학원 외에도 다양한 연구기관들이 설립되었다. 미국은 전대미문의 지식생산국이 되었고 그 결과는 현재 미국의 위상이 설명한다. 20세기에 등장한 괴상하고 신기하고 유용한 것들은 죄다 미국에서 발명되었다. 사람을 달에 보내자는 허황된 연구를 시작한 나라이기도 하다. 지금은 초중고 교육이 나락에 떨어졌다고 자탄하는 국가지만 대학·대학원의 경쟁력은 여전히 세계 최강이다.
이제부터는 우리 이야기다. 우리에게는 서양문물 도입의 중간도매상이 끼어있다. 일본의 ‘제국대학령’ 첫 문장은 이렇다. ‘제국대학은 국가의 수요에 따른 학술기예를 교수한다.’ 교육은 국민 개인의 행복실현이 아니고 부강국가 조성을 위한 것이었다. 교육 대상은 천황폐하 영광구현의 도구인 신민(臣民)이었다. 이걸 나는 ‘도구적 교육관’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앞선 황새를 뱁새가 추월하려면 황새가 아니라 타조처럼 뛰어야 한다. 후발국 일본 입장에서 유럽 황새들의 학문은 문자를 통해 도입해야 했다. 그래서 제국대학 입학 전에 예과라는 외국어 습득 과정을 배치했다. 외국어는 말하는 게 아니고 읽기만 하는 과목이었다. 예과는 지금 우리에게는 의과대학에 흔적이 남아있는 제도다. 1918년의 ‘고등학교령’은 예과를 고등학교에 이전하는 방안이었는데 여기 국가 수요에 부응하는 전략이 등장한다. 황새 국가들에 없는 이분법적 타조전법이었다. 학생들의 초기능력에 따른 문·이과 구분이 명시된 것이다.
광복이 되었다. 미국의 막강한 영향력 따라 한국의 대학들은 미국화되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는 여전히 일본의 제도를 유지했고 교복도, 읽기만 하는 외국어 교육도, 문·이과 구분도 살아남았다. 그런데 인생의 번민과 의심이 몰려 꿈틀거리는 게 고등학생 시절이다. 우리의 교육은 그런 고등학생에게 무자비한 이분법 선택을 강요했다. 문·이과 구분이 지닌 문제는 한쪽을 선택하면 다시는 그 칸막이를 넘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대학입시에서 그 너머를 향한 번복을 불허해왔다. 헌법에 적힌 행복추구권, 교육권의 행사 주체는 국가가 아니라 국민이다. 그런데 그 권리를 반으로 갈라 제한해온 것이 우리 교육이었다. 폭력은 일진이 아니고 국가가 휘둘렀고 피해자는 국민이었다. 비비고 볶아가며 새 메뉴를 생산해야 할 교육은 가운데 벽 세운 짬짜면만 차려내는 식당을 백 년간 운영해왔다.
보니, 미래의 세상은 타조가 달려가 도달할 목적지가 아니고 타조·뱁새·황새가 어우러져 사는 과정의 모습일 뿐이더라. 그래서 입시가 변해야 교육이 변할 것이니 드디어 통합형 수능이 치러졌다. 그러나 과연 사회적 관성은 깊고도 끈질겼다. 이과의 문과 침공이라는 비난·분석·우려가 쏟아졌다. 강조하거니와 남아있는 대한민국의 문·이과 구분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설정한 교육체계가 과연 백년대계였더라는 허망한 증명일 뿐이다.
대한민국을 솥에 넣고 고아내면 맨 밑에 교육열이 남는다. 그 열기를 추슬러 괴상하고 신기한 에너지로 변화시키는 것이 교육제도의 가치다. 능력과 자질에 따른 다양한 교육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넘지 못하는 칸막이는 당연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 실패와 선택을 허용해야 자본주의도, 교육도 인간의 얼굴을 하게 된다. 문과·이과라는 단어도 사어(死語)가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국민은 도구가 아니고 주인이다.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