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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 Review] 우크라 농민들 삽 대신 총…밀농사 멈춰 세계 밥상 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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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경작이 불가능해지고 해상 운송로가 봉쇄되자 세계 밀 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 우크라이나 동부 루한스크 지역 주민들이 8일(현지 시간)이 밀 포대 위에서 힘겨운 표정을 짓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경작이 불가능해지고 해상 운송로가 봉쇄되자 세계 밀 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 우크라이나 동부 루한스크 지역 주민들이 8일(현지 시간)이 밀 포대 위에서 힘겨운 표정을 짓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씨를 뿌려야 할 봄철,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삽과 곡괭이 대신 총을 쥐었다. 세계 곡물의 바닷길인 흑해는 전쟁으로 봉쇄 상태다. 농산물을 키울 비료의 원료가 되는 천연가스는 러시아가 틀어쥐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2008년 세계 식량 위기가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다.

9일(현지시간) 미국 시카고선물거래소에서 5월 인도분 미국 밀 선물 가격은 부셸(약 27.2㎏)당 12.61달러에 거래됐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최근 밀은 장 중 13달러까지 치솟으며, 2008년 세계 식량 위기 때 세운 사상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지난달 초 부셸당 7달러에서 불과 한 달 사이에 거의 2배로 치솟은 것이다.

다른 곡물 값도 고공행진 중이다. 같은 날 옥수수 가격은 부셸당 7.58달러를 기록하며 연초 대비 25% 이상 올랐다. 카놀라유의 원료인 유채는 파리 선물 시장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톤(t)당 900유로를 넘어섰다.

우크라이나는 ‘세계의 곡창지대’로 불린다. 농경지 면적이 약 42만㎢로 한반도(약 22만㎢)의 2배에 달한다. 특히 전 세계 밀 수출량의 12%를 차지한다.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18%)까지 더하면 전 세계 밀 수출에서 두 나라의 비중은 약 30%에 육박한다.

가장 먼저 문제가 생긴 건 곡물 운송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수확한 곡물은 흑해를 거쳐 전 세계 밥상에 오른다. 하지만 마리우폴과 오데사 등 우크라이나의 주요 항구도시에서 벌어진 격전으로 곡물의 해상운송이 일제히 중단됐다. 블룸버그는 “일부 철도를 통해 운송하고 있지만, 해상 무역분을 전부 만회하기는 역부족”이라고 설명했다.

당장의 공급 차질에 더해 곡물값에 불을 붙인 건 곡물난이 상당 기간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3월은 우크라이나 농사에 중요한 시기다. 지난가을 경작해 봄에 수확해야 하는 겨울 밀은 손도 못 대고 있다. 봄에 경작하는 해바라기와 옥수수는 씨조차 뿌리지 못하고 있다.

급등한 밀 선물 가격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급등한 밀 선물 가격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우크라이나에 농장을 보유한 네덜란드 국적 곡물 재배업자 키스 하위징아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농장 직원 400명 중 일부는 전쟁터에 나갔고, 일부는 수도 키이우의 대피소에서 구호물자를 전달하고 있다”며 “내일 전쟁이 끝난다고 해도 올여름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FT는 “우크라이나 농부들이 곧 파종을 시작하지 않으면 세계 식량 안보에 큰 위기가 닥칠 수 있다”며 “수확 시기에 우크라이나 밀 생산량이 줄어들 경우 (국제) 밀 가격은 2~3배까지 오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비료도 공급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비료의 원재료인 암모니아와 요소는 천연가스에서 추출한다. 세계 최대 천연가스 수출국은 러시아다. 미국과 서방의 경제 제재로 천연가스 수출도 쉽지 않게 됐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8일 오전(현지 시각)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 석탄에 대한 전면 수입 금지 방침을 발표했다.

노르웨이의 비료 제조사인 야라 인터내셔널의 스베인 토레 홀스더 최고경영자(CEO)는 “세계 인구의 절반이 비료로 키운 농작물에서 식량을 얻는다”며 “비료 공급이 원활하지 않을 경우 일부 작물의 수확량은 50% 감소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최근 발표한 2월 식량가격지수는 140.7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 세계적인 기상이변과 코로나19로 인한 공급난이 겹친 탓이다. 문제는 이 수치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반영하기 전 상황이란 것이다.

외신들은 식량 부족이 몰고 올 후폭풍을 우려하고 있다. 블룸버그는 “곡물 가격이 이 정도로 뛴 건 2008년 세계 식량위기 때로, 당시 전 세계적으로 정치적 불안을 야기했다”고 지적했다. 밀과 옥수수, 콩 등 곡물 가격이 폭등하자 식량난을 겪은 이집트와 아이티, 필리핀 등 지역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농산물펀드에 투자하는 미국 최대 상장지수펀드(ETF)인 튜크리엄의 살 길버티 최고경영자(CEO)는 “전 세계의 밀 가격은 계속 오를 것이고, 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미 밀 수입량의 약 절반을 우크라이나에서 들여오는 튀니지에서는 이번 전쟁의 여파로 밀 수입가격이 14년 만에 최고치로 뛰었다. 정부가 빵 가격 통제에 나선 상황이다. 데이비드 비즐리 유엔 산하 세계식량계획(WFP) 사무총장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밀 수입 의존도가 높은 레바논과 예멘, 시리아, 튀니지 등이 당장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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