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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서 해변서 싸울 것"…'처칠 연설'로 英에 호소한 젤렌스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우크라이나는 숲에서 들판에서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을 전율시켰던 '처칠의 연설'이 82년 만에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통해 영국 하원에 울려 퍼졌다.

8일(현지시간) 영국 하원 여야 의원들이 가득한 회의장 중계 화면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나타났다. 우크라이나 국기를 옆에 세워둔 채 국방색(카키색) 티셔츠 차림의 젤렌스키 대통령은 "나치가 당신의 나라를 빼앗으려 할 때 당신은 나라를 잃고 싶지 않았고, 영국을 위해 싸워야 했다"며 우크라이나인들도 러시아군에 맞서 영웅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바다에서, 하늘에서 끝까지 싸울 것이다. 우리는 숲에서, 들판에서, 해변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싸울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8일(현지시간) 영국 하원에서 연설하고 있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왼쪽에는 우크라이나 국기가 놓여 있다. [EPA=연합뉴스]

8일(현지시간) 영국 하원에서 연설하고 있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왼쪽에는 우크라이나 국기가 놓여 있다. [EPA=연합뉴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이다"는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수상이 1940년 6월 됭케르크 작전 직후 영국 하원에서 행한 유명한 연설이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에 파병했던 수십만 병사를 됭케르크 해변에서 가까스로 본국으로 철수하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이후 독일로부터 런던 대공습을 당한다. 처칠의 연설은 2차 대전 중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영국인들의 항전 의지를 고취시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같은 명연설을 원용함으로써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군에 의해 우크라이나 키이우·하르키우 등이 비슷한 상황을 맞고 있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CNN는 이날 "젤렌스키는 처칠의 무선 라디오와 중산모(영국 모자)를 자신의 스마트폰과 녹색 티셔츠로 맞바꿨다"며 "영국이 가장 암울했던 시기, 처칠의 유명한 연설을 인용하며 (지금 우크라이나 상황과) 비교되기를 바랐다"고 보도했다.

BBC는 젤렌스키의 9분 남짓한 연설이 이어지는 동안 일부 하원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거나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경청했다고 보도했다. 특히 "숲에서, 들판에서, 해변에서…"에서 대목에서 일부 의원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기립 박수를 보냈다.

ABC는 "영국 하원에서의 박수갈채는 보기 힘든 일임에도 젤렌스키는 연설 시작과 끝 모두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했다. BBC는 "이곳(하원)의 아치는 제2차 세계대전 폭탄에 의해 상처가 난 돌로 만들어졌다"고 역사성을 강조했다. 비록 화상이긴 해도 웨스트민스터홀이 아닌 영국 하원 회의장에서 외국 정상의 연설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처음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또 영국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문장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의 운을 띄우기도 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살아남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설을 마치고 주먹을 불끈 쥔 그를 향해 BBC는 "카키색 티셔츠를 입은 이 젊은 남성은 격앙된 듯했다"며 "그의 민주주의가, 삶이 위기에 처했다"고 평했다.

8일(현지시간) 연설을 마친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기립박수 치는 영국 의원들. [AFP=연합뉴스]

8일(현지시간) 연설을 마친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기립박수 치는 영국 의원들. [AFP=연합뉴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연설을 통해 우크라이나 영공을 비행금지구역(no-fly zone)으로 설정해달라고 다시 한번 촉구했다. 하지만 유럽연합(EU)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새로운 세계대전을 촉발할 수 있다"며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CNN은 "처칠에겐 미국이 세계 2차 대전에 참전한다는 희망이라도 있었지만 그(젤렌스키)는 미국이 핵무장한 러시아에 대항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고 짚었다. 더글라스 브링클리 미국 대통령 역사학자는 “(젤렌스키가) 역사에 민주주의를 위한 순교자로 남을 것”이라고 우려스럽게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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