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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찬호 논설위원이 간다

“국민 주권보다 행정편의 우선한 보신주의가 낳은 참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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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문가들이 본 사전투표 난맥상

관외 사전투표 우편물(빨간 상자 표시)이 CCTV가 작동하지 않는 사무국장 사무실에 보관돼 논란이 된 부천시 선관위. [연합뉴스]

관외 사전투표 우편물(빨간 상자 표시)이 CCTV가 작동하지 않는 사무국장 사무실에 보관돼 논란이 된 부천시 선관위. [연합뉴스]

지난 4~5일 코로나19 확진자·격리자의 대선 사전투표 진행 과정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부실 관리 사태가 발생했다. 선관위가 유권자보다 행정편의와 조직논리를 우선한 결과란 비판이 전직 선관위 간부 등 선거 전문가들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내용을 짚어본다.

①국민주권 대신 법령에만 집착=당초 선관위는 확진자들을 위해 별도의 투표함을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그러나 ‘하나의 투표소에서 동시에 2개의 투표함을 사용할 수 없다’는 공직선거법 151조 2항이 문제가 됐다. 선관위 법무국 출신 법조통들은 “이 조항에 따라 별도의 투표함 설치는 불가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장애인 등 거동 불편자에 대해 예외적으로 실시하는 ‘임시투표’  발상이 나왔다는 것이다. 임시투표는 승강기가 없는 투표소에 장애인이 투표하러 올 경우 본인의 동의를 얻은 뒤 투표장 밖에 설치된 임시 기표소에서 투표케 하는 제도다.

선관위 “투표함 추가 설치 안 돼”
투표 시간 연장 막은 간부는 격려
사전+본투표 ‘3일 연속 투표’ 제안
“관리인력 구하기 어렵다” 반대만

기표를 마친 투표자가 참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투표사무원이 건네주는 봉투에 투표지를 넣으면, 사무원이 봉투를 들고 투표장에 들어가 투표함에 넣는 방식이다. ▶거동 불편자에 한해 ▶본인의 동의를 얻어 시행하는 극히 예외적인 방식이었다. 발생 빈도도 제로에 가깝기에 투표사무원은 따로 투표지를 보관하는 용기를 마련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 사전선거는 투표장마다 수백명의 확진자가 몰려 사정이 전혀 달랐는데도 선관위가 이런 임시투표 방식을 적용하면서 참사가 발생한 것이라고 선거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종이박스에 투표지가 보관돼 논란을 빚은 부산 해운대구의 한 사전투표소의 모습. [연합뉴스]

종이박스에 투표지가 보관돼 논란을 빚은 부산 해운대구의 한 사전투표소의 모습. [연합뉴스]

한 선관위 전직 간부는 “투표소는 대부분 주민센터 2층에 있다”며 “매뉴얼대로라면 수백명의 확진자가 투표할 경우에도 사무원은 봉투에 든 투표지를 한 장씩 들고 2층 투표장에 올라가 투표함에 넣은 뒤 다시 내려와 같은 행동을 수백번 반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리적으로 힘들다 보니 종이상자나 바구니에 투표지를 여러 장 모은 뒤 투표소에 올라가는 편법을 쓴 것이란 지적이다. 사무원 한명에게 투표지가 여러 장 몰리다 보니 투표함에 넣어야 할 봉투를 새 봉투로 착각하고 투표자에게 줬다가 이미 기표가 된 투표지가 나오는 실수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전직 간부는 “선관위는 투표장에 투표함을 하나만 둬야 한다는 151조2항을 지킨다고 고집하다가 ‘투표자는 투표지가 안 보이도록 접은 뒤 참관인 앞에서 투표함에 넣어야 한다’는 선거법 157조4항을 어긴 것”이라며 “두 조항이 충돌한다면 헌법상 비밀·직접 투표 원칙을 규정한 157조4항을 우선 적용해야 하는데 하나만 보고 둘은 모른 근시안적 행정이 참사를 부른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선관위의 목표인 ‘국민의 주권 실현’을 최우선으로 하면 답이 보인다”고 지적했다. 2014년 세월호 사태 때 6·13 지방선거가 실시되자 선관위는 팽목항에 머물던 유족들을 위해 인근에 사전투표소를 설치하려 했다. 그러나 선거법상 투표소 설치 공고 기간을 넘긴 시점이라 법만 따지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선관위 관계자는 ‘국가 재난 상황이라 세월호 유족들도 주권을 실현할 권리를 줘야 한다’며 설치를 강행했다. 덕분에 사전투표를 할 수 있었던 유족들은 이 관계자의 손을 붙들고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했다고 한다. 불법 시비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부천시 선관위 사무국장실의 CCTV가 종이로 가려져 있다. [뉴스1]

부천시 선관위 사무국장실의 CCTV가 종이로 가려져 있다. [뉴스1]

② ‘투표시간 연장’ 막아낸 간부에 쏟아진 칭찬=국회는 지난달 14일 본회의를 열고 9일 대선 본 투표 종료 시점을 오후 6시에서 7시 30분으로 연장했다. 이 1시간 30분 동안 확진·격리자들이 따로 투표하게 한 것이다. 당초 정치권은 확진자들에게 충분한 투표 기회를 주기 위해 오후 9시까지 3시간 연장을 제안했다. 그러나 선관위가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고 강력히 주장해 관철됐다는 것이다.

국회 관계자는 “실무자인 선관위가 자신 있는 태도를 보여 그들의 말을 따르기로 결정됐다”고 전했다. 그러나 선관위 주변에선 다른 얘기가 나온다. “저녁 9시까지 투표시간을 연장하면 선관위 직원들의 피로가 누적되고 추가 야근 인력을 구하기도 어렵다고 선관위 내부에서 극력 반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부 압박을 받은 선관위 관계자가 행안위에서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해 뜻을 관철했다는 것이다. 한 소식통은 “3시간 연장안을 1시간 30분 안으로 막아낸 이 관계자에게 선관위 직원들은 ‘잘하셨다’는 칭찬을 쏟아냈다고 한다”고 전했다.

제주도 선관위 사무국장실에 보관된 사전투표함과 투표용지. [연합뉴스]

제주도 선관위 사무국장실에 보관된 사전투표함과 투표용지. [연합뉴스]

전직 선관위 간부는 “이 역시 행정 편의적 발상으로 투표권 실현을 막은 것”이라며 “확진자 급증 추이를 고려했다면 당연히 예산과 인력을 보강해 투표 시간을 늘려줬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③ 3일 연속 투표는 안 되나=본 투표일 4~5일 전에 실시되는 사전투표는 ‘부정선거 음모론’의 집중 타깃이 됐다. 투표함 보관이나 관외 투표자의 투표지 이송 과정에서 표가 바꿔치기 될 우려 때문이다. 특히 이번 대선에선 사전투표에서 확진자 투표가 부실하게 관리된 탓에 음모론이 더욱 기승을 부릴 여지를 줬다.

부산 연산4동 한 투표소에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등에게 기표된 투표지가 일부 유권자에게 배부돼 논란이 일었다. 선거 전문가들은 “국민주권보다 행정 편의를 앞세운 선거 관리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부산 연산4동 한 투표소에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등에게 기표된 투표지가 일부 유권자에게 배부돼 논란이 일었다. 선거 전문가들은 “국민주권보다 행정 편의를 앞세운 선거 관리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국민의힘 선대본부 디지털본부장인 이영 의원(초선·비례)은 “항상 수요일에 치러지는 전국 선거(대선과 총선 및 지방선거)는 당일 전 이틀간(월·화요일) 사전 투표를 실시하면, 투표함을 바꿔치거나 투표지를 조작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져 '부정선거론'과 같은 국민 불신이 원천 차단된다면서 대선을 3일 연속 실시하는 방안도 하나의 대안으로 제안하는 분들이 많다"고 전했다.

선관위 사무총장과 상임위원을 지낸 문상부 씨도 지난해 말 야당 몫 선관위원 후보로 지명된 직후 국회에 낸 의견서에서 3000여곳으로 제한된 사전투표소를 늘리는 것을 전제로 3일 연속 대선을 치르는 방안을 제안했다. 문 씨는 “사전투표는 실시 이후 대선 당일까지 후보 사퇴 등 돌발변수나 민심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이어 “사전투표지의 개표는 투표가 이뤄진 곳의 선관위에서 하고, 선거가 끝난 뒤 투표자의 주소지 선관위로 투표지를 이전시켜 보관하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선관위 안팎에선 “3일 연속 대선을 치르면 직원들의 업무가 가중되고 주로 행정 공무원이 투입되는 투표 관리 인력을 구하기 어려워지는 등 애로가 많을 것”이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전직 선관위 간부들은 “부정선거 음모론을 원천 차단함으로써 선거의 신뢰성을 높이는 효과 대신 선관위의 업무 편이를 우선한 안이한 논리”라고 비판했다.

“선관위원 9명중 2명이 공석, 기형적 구조도 사태의 원인”

사전투표 부실관리 사태는 선관위의 기형적 지휘 체제를 감안하면 ‘예견된 참사’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선관위는 최고결정기구인 중앙위원이 정원(9명)에서 2명이나 부족한 7명에 불과하다. 그중 여야 합의로 국회가 선출한 조병현 위원을 뺀 6명이 여권의 임명·지명·추천으로 자리에 오른 이들이다. 특히 요직인 상임위원과 야당 몫 선관위원이 공석인 가운데 전국단위 선거를 치르는 건 1987년 민주화 이래 처음이다.

여야 모두의 책임이 크다는 비판이 나온다. 우선 상임위원은 지난 1월 친여 성향인 조해주 전 상임위원이 ‘꼼수 연임’ 논란 끝에 사퇴한 뒤 청와대가 후임을 임명하지 않아 공석인 상태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선관위원 중 한명을 호선(互選) 방식으로 조 전 위원 후임에 앉히려다 선관위 내부 반발에 부딪혀 무산되자 “대선이 임박해 인사청문회를 밟을 겨를이 없다”며 손을 놓은 결과다. 야당 몫 선관위원 역시 지난해 12월 추천된 문상부 후보가 여당의 반대로 임명이 지연되자 자진해서 사퇴한 뒤 국민의힘이 후보 추천을 미뤄 공석인 상태다.

국회 관계자는 “국민의힘은 야당 몫 선관위원 후보를 새로 추천하면 청와대도 대응 차원에서 상임위원을 임명할 것으로 본다. 그러면 친여 성향 위원이 6명에서 7명으로 느는 데다 상임위원의 힘이 일반 선관위원보다 훨씬 강하므로 국민의힘 입장에선 차라리 야당 몫 위원 없이 대선을 치르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라 전했다. 그는 “청와대와 야당의 이런 꼼수 때문에 선관위가 파행하다 보니 투표관리도 부실하게 된 것”이라며 “이게 끝이 아니다. 대선 뒤 상임위원 임명을 놓고 문 대통령과 대통령 당선인이 각각 권한을 주장하며 충돌할 우려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