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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월요인터뷰

프랑스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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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사진=강정현 기자]

만난 사람=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프랑스 출신의 기 소르망(Guy Sorman)은 유럽의 대표적인 문명비평가다. 아시아에 관심이 많으며 한국에 자주 온다. 그의 입장은 중국에 아주 비판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그는 중국이 한반도 통일의 최대 걸림돌이고, 북한 핵실험은 중국의 격려 아래 실시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거침없이 편다. 그렇게 의심하느냐고 물으면 의심하는 게 아니라 그런 사실(fact)을 알고 있다고 응수한다. 그래도 서울대와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공동 운영하는 유럽연합(EU)센터 초청으로 서울에 온 그를 만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사담 후세인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는데 승자의 판결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이 판결을 정의로운 정의(Just justice)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번 판결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폭력.복수.종족분쟁만 난무하던 곳에 법의 지배가 시작됐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이죠. 절차에 다소 문제가 있어도 최소한 인권침해를 심판한다는 법의 지배는 확립됐어요."

-대량살상무기(WMD)가 발견되지 않아 미국의 이라크 전쟁이 도덕적 정당성을 잃었는데도 말입니까.

"전쟁이 일어난 건 유감스럽지만 전쟁이 없었다면 재판도 없었을 겁니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시작한 게 잘못된 것이라고 똑 부러지게 말하긴 힘들어요. 진짜 전쟁은 미국과 무슬림 간의 전쟁이 아니라 무슬림끼리의 전쟁입니다. 아랍뿐 아니라 전 세계 10억 무슬림이 자신들의 미래를 걸고 벌이는 그들의 전쟁, 온건 무슬림들과 근본주의 무슬림들의 싸움입니다. 미국과 유럽은 여기서 한쪽의 편을 들었어요. 편을 들지 말았어야 했지만 공격받았기 때문에 할 수 없었어요."

-미국과 유럽은 무슨 권리로 한쪽의 편을 들었습니까.

"서방세계에는 자유주의와 인권, 민주주의가 인류가 추구해야 할 가치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어요. 제국주의적이란 비판에도 서방의 사고방식이 그런 게 현실입니다. 서방에는 인권 문제에 간섭하는 오랜 역사적 전통이 있어요."

-아랍세계가 미국과 유럽의 간섭을 제국주의적이라고 거부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아랍세계의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는 실제로 잘 몰라요. 중동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지배하던 1920년대와 30년대, 심지어 50년대까지 아랍 대중이 선택한 정당은 온건한 자유주의적 정당이었어요. 그들은 정상적인 경제 시스템을 원했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싶어 했어요. 침묵하는 다수가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이라크 전쟁은 실패입니까.

"일부 성공, 일부 실패죠. 개전 초기 3년은 큰 실패였어요. 미국은 이라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몰랐거든요.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요. 바그다드와 수니파 거주 지역이 문제지만 많은 곳에서 학교가 문을 열고 건설이 시작되고 있어요. 문제는 미군이 얼마나 더 머물 것이냐입니다."

-이라크 전쟁의 결과로 이라크 국민의 삶이 후세인 시절보다 더 행복해졌습니까.

"누구의 삶이냐에 따라 다르겠죠. 시아파나 쿠르드족의 삶은 좋아졌는데 사담 후세인이 속한 수니파의 형편은 당연히 나빠졌어요.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수니파.시아파.쿠르드족 사이에 미군이 계속 주둔해 내전을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귀하는 문명 간의 대화를 주제로 하는 포럼에 참가했는데 문명 간의 대화, 그게 대체 뭡니까. 대화는 누가 하는 겁니까.

"문명은 지나치게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그래서 묻는 겁니다.

"대화란 상대편을 이해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겁니다. 현실세계에서 과연 대화가 가능할까요. 외교에는 진실한 대화가 없어요. 프랑스와 독일이 1000년 동안 싸우다가 평화를 구축했지만 시장경제라는 틀과 경제 교류의 덕이지 대화의 결과는 아니었어요. 그리고 누가 문명을 대표해 대화를 한다는 겁니까. 터무니없는 생각이에요. 권력을 쥔 사람들이 문명이란 개념을 조작하고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요.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에도 문명에 대한 개념이 정의돼 있지 않습니다."

-대화를 통한 평화는 허상이라는 귀하의 생각이 북한에도 적용됩니까.

"대화 자체를 반대할 순 없죠. 대화는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단 나아요. 하지만 결과를 기대하는 건 무리입니다. 언제나 경제적인 접근이 더 효율적입니다.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누구와 대화하는지가 관건입니다."

-EU의 성공은 유럽의 유대.기독교적(judeo-christian) 전통의 덕입니까.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라는 안보 보호막과 미국이 없었다면 EU도 없었을 겁니다. 유럽 공통의 전통은 종교라기보다는 그리스.로마적 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의 지배라는 사고방식이 유럽 사회에 존재하는데 그건 그리스.로마 사회에 바탕을 둔 겁니다. 기독교에 대한 논쟁은 터키를 EU에 받아들이느냐에서 시작되는데 터키에 대한 정치.문화적 선호를 종교의 이름으로 감추려는 것일 뿐이죠.

-법의 지배라는 공동의 전통이 없거나 약하고, 유교적인 전통이라고 해도 한국.중국.대만 정도에 한정된 아시아에서 EU 같은 지역 통합이 가능할까요.

"같은 문명권이라는 사실이 갈등과 충돌을 막지는 못합니다. 과거 영국과 프랑스 관계를 봐도 같은 문명권 내의 갈등과 분쟁이 더 심해요. 그러나 유럽 국가들은 예측 가능(predictable)했다는 점이 달라요. 중국이 지역 통합의 큰 장애입니다. 중국은 전망과 예측이 불가능한 정권입니다. 이데올로기적 정치체제의 문제가 문화적 다양성 문제보다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아시아는 16세기부터 뭐가 잘못돼 유럽 제국주의의 먹이로 전락한 겁니까. 문명이나 문화적 토양이 유럽보다 약합니까.

"유럽에선 인류가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어요. 근대화라는 사건입니다. 갑자기 학문.종교.과학 분야에서 기존의 흐름을 바꾸려는 시도가 일어난 것이었어요. 그건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지만 원인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아시아가 잘못한 게 아니라 유럽에서 희한한 일(genetic accident)이 일어난 겁니다."

-세계의 으뜸가는 산유국 이란이 에너지를 위해 핵 프로그램을 추진하겠다는 건 어불성설 아닙니까.

"맞아요. 이란의 천연가스와 원유 보유량을 보면 핵 개발이 전혀 필요치 않아요. 핵 개발은 군사적인 목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이란은 과거 페르시아제국의 꿈을 좇아 중동 석유의 장악을 노리고 있어요. 문제 해결의 길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내부 혁명이고 다른 하나는 군사적 시나리오예요. 이스라엘이나 미국이나 연합군이 이란을 공격할 수도 있어요."

-유엔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의 제재가 북한의 비핵화에 효과적입니까.

"내 판단으로는 북한 정권의 핵 개발은 중국의 승인을 받지 않고는 불가능했어요. 북한이 중국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죠. 중국이 북한의 핵실험에 놀라는 척하면서 강력하게 경고하는 모습은 연극에 지나지 않아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중국은 북한이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고 판단하는 듯해요. 한국을 통제하고 미국에 창피를 줄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라고 여기는 듯하다는 말입니다. 미국도 그걸 알고 있어요. 국제무대엔 대단한 위선이 존재합니다. 모두 각본에 따라 연극을 하고 있어요."

-대단히 도발적인 음모론으로 들리네요. 그렇다면 북 핵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북한보다는 중국과 협상을 해야겠군요.

"연극을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북한과 대화하는 척하는 거죠. 진정으로 한반도의 비핵화를 원한다면 국제사회는 북한이 아니라 중국에 압력을 넣어야 해요. 제재 대상도 중국으로 잡아야 하고. 이건 음모론이 아니라 분명하게 보이는 사실입니다."

-귀하는 최근 스웨덴 총선에서 중도우파 연합이 승리한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데 유럽의 보수화 추세를 과소평가하는 것 아닙니까.

"유럽 전반에 보수화 바람이 분다고 할 순 없어요. 대처리즘이나 레이거노믹스가 유행하던 시기, 심지어 80년대 독일의 중도우파 콜 총리 집권 때와 비교해 봐도 그래요. 지금은 좌파, 우파 모두 중도로 수렴되고 있는 형국입니다. 스웨덴 총선에서 진 사민당 역시 시장경제를 중요시하는 중도좌파였어요. 선거 결과를 이데올로기 혁명으로 해석하는 건 무리예요. 유권자들이 중도좌파로 만족하지 못하자 중도우파로 방향을 살짝 바꾼 것뿐입니다. 유럽은 전체적으로 중도좌파가 집권하고 있지만 과거와 달리 매우 걱정되는 점이 있다면 보수와 진보가 모두 중도로 오면서 극우.극좌 정당들의 지지도가 오히려 올라가고 있는 겁니다. 그건 집권당의 권위를 떨어뜨려 개혁을 어렵게 만들고 있어요. 50%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집권당에 개혁을 추진할 힘이 있을 수 없죠."

-왜 그런 현상이 생깁니까.

"세계화에 대한 공포 때문입니다. 지금이 전환기입니다. 젊은이들 세대로 가면 달라요. 세계화는 생활과 문화의 일부가 될 겁니다. 젊은이들은 세계화의 개념을 잘 이해하고 세계화에 대한 공포도 없어요. 장기적으로 극우.극좌 정당들은 설 곳을 잃게 될 겁니다."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의 '제3의 길'이나 독일 슈뢰더 전 총리의 '노이에 미테(Neue Mitte:신중도)' 노선은 어떻게 됐습니까.

"정치적 담론으로는 한때 효과가 있었지만 지금은 생명이 다했어요. 그런 정치적 담론은 노동당과 사민당을 각각 극좌에서 중도로 끌어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자유시장경제가 더 효율적'이라며 당의 정체성을 바꿀 순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내부 당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정치적 슬로건을 만들어 낸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슬로건이 필요없는 시대가 됐어요."

정리=최지영 기자 <choiji@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