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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 FDPR 면제 “대러 추가 수출통제” 기업 피해 확산 예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미국이 한국을 대 러시아 수출 통제 관련 해외직접제품규칙(FDPR) 면제 대상국에 포함하기로 했다. 이번 조치에 따라 한국 기업이 제재 관련 품목을 수출할 때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아도 된다.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에서 돈 그레이브스 상무부 부장관과 한-미간 대 러시아 수출통제 공조 등을 면담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제공=뉴스1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에서 돈 그레이브스 상무부 부장관과 한-미간 대 러시아 수출통제 공조 등을 면담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제공=뉴스1

산업통상자원부는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돈 그레이브스 미 상무부 부장관 등 관련 인사를 만나 이같이 합의했다고 4일 밝혔다. 산업부 측은 “이 자리에서 미국은 한국의 대러 수출 통제 이행 방안이 국제 사회 (제재) 수준과 잘 동조화됐다고 평가했다”며 “이번 FDPR 면제 결정과 함께 (한국은) 미국 등 국제 사회와 유사한 수준의 추가적인 수출 통제 조치에 들어가게 된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는 이르면 4일 한국을 FDPR 면제 대상 국가 명단에 올리는 내용을 관보에 게재할 예정이다.

FDPR은 미국이 아닌 국가에서 만든 제품이라도 미국산 소프트웨어ㆍ기술 등이 들어갔다면 미 정부가 직접 수출을 금지할 수 있도록 한 제재 규칙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난달 24일 미국 정부는 유럽연합(EU) 27개국과 호주ㆍ캐나다ㆍ일본ㆍ뉴질랜드ㆍ영국 등 32개국을 FDPR 면제 국가로 지정했지만, 한국은 포함하지 않아 논란이 됐다. 러시아를 겨냥한 수출 통제 조치 동참에 한국 정부가 늑장 대응하면서 국내 수출 기업이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일었다. 결국 한국이 다른 동맹국보다 일주일여 늦게 FDPR 면제 명단에 오르게 되면서 ‘뒷북 대응’ 논란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뒤늦게나마 한국이 FDPR 면제 대상국이 됐지만 그렇다고 관련 제품을 국내 기업이 러시아에 수출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미국 정부가 아닌 한국 정부로부터 국내 법규에 따라 수출 통제 사전 심사ㆍ승인을 받게 됐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미국 정부가 실시하는 FDPR과 동일한 수준의 수출 통제 조치를 시행하는 동맹국에 한해 자체 심사ㆍ승인 권한을 부여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로 대 러시아 중소기업 수출 비중이 높은 중고차 업계의 타격이 우려되는 가운데 3일 오후 인천시 연수구 송도유원지 중고차 수출단지에 중고차가 가득 차 있다. 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로 대 러시아 중소기업 수출 비중이 높은 중고차 업계의 타격이 우려되는 가운데 3일 오후 인천시 연수구 송도유원지 중고차 수출단지에 중고차가 가득 차 있다. 연합뉴스

미국 상무부 고시에 따르면 수출 통제 대상은 러시아 군수 산업에 쓰일 가능성이 있는 반도체, 통신기기, 센서, 항법 장비, 해양 장비 등 7개 분야와 하위 기술을 포괄한다. 다만 현재 규정에 따르면 러시아 민간인이 사용하는 최종 소비재 품목 대부분은 수출 통제 적용을 받지 않는다. 군수용이 아닌 자동차ㆍ가전제품ㆍ기계 등은 지금처럼 러시아 수출이 가능하단 얘기다.

하지만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가 장기화할 조짐이 나타나며, 미국 등 국제 사회의 제재 수위가 한층 높아질 가능성도 커졌기 때문이다. 지난달 28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우크라이나 위기가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서 “수출 통제 리스트(CCL) 카테고리 3~9(반도체, 통신기기 등 7개)에 등재된 상품만이 아니라 한국의 대러 주력 상품인 자동차ㆍ기계ㆍ플라스틱ㆍ전기제품 등 수출 행정 규제(EAR99) 상의 최종 소비재에도 FDPR이 적용될 경우 대러 수출이 급감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러시아 정도의 경제 규모를 가진 국가에 대해 미국 주도로 주요국 대부분이 일제히 경제 제재를 가한 건 유례가 없는 일이다. 러시아 사태 이전 미국이 FDPR을 적용한 건 2020년 이후 중국 화웨이 정도가 최근 사례인데, 특정 기업에 한정한 조치라 여파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러시아ㆍ우크라이나 사태가 조기에 수습되지 않는다면 소비재인 자동차ㆍ가전제품 등으로 수출 통제가 확산할 위험도 있다.

기업 현장의 혼선은 극에 달하고 있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산업부 전략물자관리원, 코트라, 무역협회 등에 접수된 기업 애로 사항 접수 건수는 이날까지 668건을 기록했다. 지난달 24일 창구 개설 이후 불과 열흘도 되기 전 수백 건에 달하는 피해ㆍ문의 사항이 접수됐다.

수출 통제가 당장 강화되지 않더라도 불확실성으로 인해 관련 기업의 수출ㆍ생산 등이 위축될 위험은 이미 커졌다. 러시아를 주 교역 대상으로 하는 중견ㆍ중소기업에 피해가 집중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물가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며 발언하고 있다. 뉴스1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물가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며 발언하고 있다. 뉴스1

이와 관련해 정부는 이날 이억원 기재부 제1차관 주재 우크라이나 사태 비상 대응 태스크포스(TF) 회의에서 2조원 규모 긴급 금융지원 프로그램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산업ㆍ기업ㆍ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을 통해 피해 기업을 대상으로 특별 대출을 해주기로 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손해를 이미 봤거나 피해가 예상되는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0.4%포인트에서 최대 1%포인트 대출금리 인하, 대출 만기 연장, 특별 상환 유예 등 혜택도 준다. 2조원 규모 특별 대출은 이날 바로 시작한다.

정부는 러시아ㆍ우크라이나산 수입이 차질을 빚어 수급난이 예상되는 품목에 대한 대응책도 실시한다. 반도체 공정에 필수인 네온ㆍ크립톤 등은 이달 할당관세(한시적 관세 인하) 적용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다음 달 종료 예정이던 유류세 20% 인하, 액화천연가스(LNG) 관세 0% 적용 조치도 오는 7월까지 3개월 연장하기로 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이날 물가관계장관회의에서 “향후 국제유가가 현 수준보다 가파르게 상승해 경제 불확실성이 더 확대될 경우 유류세 인하 폭 확대 여부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정부는 수급 불안 가능성이 커진 사료용 곡물과 관련해서도 대체원료 할당 물량을 이달 내 늘리고, 대체 수입선을 확보하는 등 조치를 검토한다. 명태ㆍ대구 등 러시아산 의존도가 높은 수산물에 대해선 정부 비축 물량 방출 등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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