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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이봉래 감독 작가서 데뷔한 "팔방미인"|임영<영화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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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10면

이봉래(1927년 생)-. 예총 회장 4기를 연임하곤 일체의 사회적 활동을 중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년엔 친구들과의 담소가 좋아 시바스 리갈 큰 것 두 병을 혼자서 마셨더니 말이 좀 새는 듯하다가 뇌 혈전으로 쓰러졌다. 그러나 지금은 목소리와 말이 다 완전하며 몸가짐도 정상이다.
기적에 가까운 놀라운 회복 력이다. 현재는 현대시인 협회장을 하라고 해서하고 있다.
50, 60년대에 시인·평론가·시나리오 작가·감독으로 팔면육비의 활동을 했다는 얘기는 여기서 이미 했었다. 신랄한 미술평론을 썼더니 기세용 화백이 미군야전용 손도끼를 신문지로 싸 들고 와 공격하려고 해 앉아 있던 다방에서 긴급 피난했던 얘기는 지금도 전설적으로 남아 있다.
그는 조봉암씨 사위로 진보당 사건 이후엔 각종 저널리즘이 그의 원고를 기피했다. 아무 것도 아닌데도 쩍하면 순경이 집 앞에 와 서 있고 는 했다. 예총 회장 선거를 비롯한 각종 선거 때엔 늘 빨갱이라는 중상을 받았다.
50년대 중반 이집길 배우가 죽어 문상 갔더니 홍성기 감독이 삭풍 몰아치는 추운 겨울인데도 와이셔츠 바람으로 와 있었다.
홍성기 감독은 태양신문 편집국장, 부산일보 주필 등을 지낸 와세다 대학 출신 언론인 심형섭씨 등과 함께 국제 코민테른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들어갔다가 방금 나온 때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김부전 국제극장 주인이 돈을 대서 영화를 만들게 되었으니 시나리오를 급히 쓰라는 것이었다.
이봉래는 일본에서 국제 타임스 문화부장을 지냈으며 한때는 시나리오작가 택촌 면이 주재하는 시나리오 연구회 십일 회 회원이기도 했었다.
그 당시 천 초 연예가 이야기를 많이 썼던 일본작가 고견 순은『이 군은 배우가 되지 그래』하고는 했었다.
『순애 보』의 박계주가 쓴『별아 내 가슴에』를 시나리오로 썼다. 김지미의 실질적 데뷔작이랄 수 있는 이 영화는 국제극장에서 20만 명이 들었다. 흥행이 성공하자 시나리오 청탁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신상옥 감독의『동심 초』도 그 중의 하나가 된다.
시나리오 청탁이 하도 쇄도해 혼자서는 처리할 방법이 없어 재판소 뒤쪽에 있던 동아호텔 방 두개를 잡아 후에 감독이 되는 전범섬·박옥상을 조수로 시나리오 공장(?)을 차렸다. 여기서 약 45편을 생산하니까 시나리오 협회장이 되었다.
영화계에서는 지불을 약속어음으로 하는 관습이 오래 전부터 있다. 이 당시도 어김없는 약속어음으로 착수금을 가져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전범성은『이 선생은 현금을 가져와야 재미나게 더 잘 쓴다』고 말해 현금을 가져오게 하고는 했다.
영화계의 약속어음은 유명해 지금도 모「짠 돌이」영화사 사장은 직원 월급을 약속어음으로 준다고 하여 젊은 영화인들의 빈축을 사고 있다.
감독 데뷔는『행복의 조건』(59년)이라는 전범성과의 합작 시나리오로 한다.『백주의 암흑』(61년)은 야심적인 사회드라마였다. 김영수 원작의『새댁』에선 도금봉이 주연했는데 아시아 극장 개관 프로로 15만 명이 들었다.
사회풍자 드라마『3등 과장』은 을지극장에서 12만 명이 들었다. 만드는 것마다 흥행적으로 망한 것은 거의 없다. 이 당시의 이봉래는 비대한 몸집으로 대단히 정력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약 40편을 감독했다. 감독 협회장도 지내고 영화인협회장도 지냈다.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는 영화평론을 했는데, 신상옥 감독이『무영탑』(57년)을 만들고 시사회 후에 중국 음식점 아서 원으로 초대했다.
신상옥 자신은 안 나오고 그의 일을 맡아보던 황 남배우가 나왔다. 한때 한국문학 예술계의 대표적 호걸(?)이었던 박인환 시인이 술잔을 황 남에게 내던지며『거지같은 영화 만들어 보라고 하고는 이까짓 것 낸다고 내느냐』고 호통을 쳤다. 후에 신상옥이 박인환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평론가·시나리오 작가·감독일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세련된 딜레탕트였던 유두연은 취중에 삼선 교에서 떨어져 다리와 눈을 다쳤다. 의사가 술 더 마시면 죽는다고 경고하니까 술을 마셨기 때문에 다리에서 떨어지고도 살았다고 더 마셨다. 영화평론가 유지나의 아버지다. 그들 그룹 중에선 이봉래 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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