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5년짜리 정책 언제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조민근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정책디렉터

조민근 정책디렉터

여드레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의 향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한 가지 확실해 보이는 건 있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 정책 상당수는 해체되고, 지워질 운명이란 것이다.

‘문 정부와 반대로’가 사실상 핵심 공약인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당선될 경우는 굳이 말할 것도 없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역시 “좌파 정책이냐, 우파 정책이냐 가리지 않겠다”며 차별화를 시도한다. 규제 중심의 부동산 정책을 시작으로, 탈(脫)원전, 통제 일변도 방역과도 거리를 두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오르락내리락하는 후보들 지지율과 달리 꾸준히 절반을 넘는 ‘정권 교체 선호’ 여론이 만든 현상이다.

정부 바뀔 때마다 국정 급변침
과속 집행-폐기는 예고된 운명?
문 정부 탈원전·K방역 힘 빠져
차기 정부도 연금개혁 손 놓나

청와대도 운명을 예감한 것일까. 지난주 문 대통령은 원전을 두고 “향후 60여 년 동안은 주력 기저전원”이라고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임기 내내 탈원전에 방점을 두던 것과는 사뭇 결이 다르다. 관가에선 책임론을 의식한 임기 말 ‘알리바이용’ 이란 말도 나온다.

지난달 25일 열린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현안 점검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으로부터 보고 받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5일 열린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현안 점검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으로부터 보고 받고 있다. [연합뉴스]

청와대가 대표적인 성과로 내세우던 K방역 고삐도 빠르게 풀고 있다. 법원의 제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이던 방역패스까지 접으며 ‘자율방역’을 강조하고 있다. 질병관리청 등에서 “너무 이르다”며 반대 목소리가 나왔지만 소용없었다고 한다. 무엇이 급한지 유행이 정점에 다다르지도 않은 상황에서 ‘출구’와 ‘일상 회복’ 메시지도 거듭 나온다. 오미크론 변이의 특성에 맞춘 것이라고 하지만 선거를 앞두고 여당 후보조차 방역 완화를 요구하고 있는 사정과 연관이 없다고 하긴 정황상 어려워 보인다.

문재인표 정책의 퇴각은 정권이 출범하던 5년 전 이미 예고됐을지도 모른다. 앞선 정부도 그랬다. 새 정부는 전 정부의 색채를 서둘러 지운 뒤 속성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짧은 임기 속 핵심 정책은 제대로 여건과 비용을 따져보지도 않은 채 ‘과속’하기 일쑤였고, 곧 부작용이 불거졌다. 결국 정권이 바뀌면 다시 폐기되고 새로운 브랜드로 대체되기를 반복했다. 이 과정에서 정책의 맥은 뚝뚝 끊겼고, 우리 사회가 치러야 할 매몰비용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이쯤 되면 5년 단임 대통령제가 만들어내는 구조적 문제라 할만하다. 게다가 문 정부 들어선 또 다른 악순환의 고리까지 전면에 부상했다. 표 안 되고, 부담스러운 과제는 5년만 버티면 다음 정부로 떠넘길 수 있다는 무책임이다.

이번 대선후보 토론 과정에서 ‘공동선언’ 제안까지 나온 연금개혁이 대표적이다. 국민연금은 이대로 가면 2055년에는 고갈될 예정이고, 이미 구멍이 난 공무원연금과 군인연금은 세금을 들여 메우고 있다. 심각하다는 걸 누구나 알지만 강력한 정치적 저항이 두려워 본격적인 수술에 나서기도 어려운 문제다. 그래도 역대 정부는 소폭이라도 뜯어고치려 노력하며 십시일반 부담을 나눴다.

문 대통령 역시 후보 시절에는 국민연금을 개혁하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보험료를 ‘더 내는’ 개편안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며 탐탁지 않아 했다. 눈치를 보던 정부도 여러 종류의 개편안을 뭉텅이로 국회에 넘겨놓고는 사실상 손을 뗐다. 청와대가 주도적으로 국회를 설득해도 따라올까 말까 한데, 떠넘기듯 했으니 논의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결국 2020년 박능후 보건복지부 당시 장관은 “다음 대선에서 의제로 부각돼 해결책을 찾아갔으면 한다”며 일찌감치 차기 정부로 책임을 돌렸다. 문 정부는 이렇게 국민연금 도입 이래 공적연금에 손대지 않은 유일한 정부라는 기록을 남기게 됐다. 처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째는 쉬운 법이다. 이어 전기요금 인상도, 재정건전성 확보도 차례차례 다음 정부의 몫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새로 들어설 정권이라고 문 정부가 떠넘긴 짐을 지려 할 지는 미지수다. 더구나 이들은 문 정부가 나랏돈 풀고, 표 떨어질 일 근처에도 가지 않는 방식으로 임기 말 지지율 40% 선을 유지해가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봤다.

양강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집을 봐도 이미 ‘학습효과’가 작동하고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후보들이 너나없이 동의했다는 연금개혁 공약은 ‘위원회를 만들고 사회적 합의 아래 추진하겠다’는 원칙론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절차를 제시할 뿐 ‘어떻게’는 잘 보이지 않는다. 디테일이 살아있는 ‘소확행’ ‘심쿵’ 공약과 대비도 선명하다. 과거 후보들이 억지로라도 공약집에 담았던 공약 재원 조달 방안도 약속이나 한 듯 사라졌다. 문 정부의 정책이 차례차례 부정당하고, 지워지는 가운데 자칫 ‘해야 할 일을 건너뛰어도 문제가 없더라’는 경험만 유산으로 남아 이어지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