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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이념 에너지 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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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원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원배 경제산업디렉터

김원배 경제산업디렉터

“고리 1호기의 가동 영구 정지는 탈핵 국가로 가는 출발입니다. 안전한 대한민국으로 가는 대전환입니다.”

취임 한 달여를 맞은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6월 부산 기장군에서 열린 고리 원전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한 말이다. 이 자리에서 ▶준비 중인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은 전면 백지화하고 ▶원전의 설계 수명을 연장하지 않으며 ▶수명을 연장해 가동 중인 월성 1호기는 전력 수급 상황을 고려하여 가급적 빨리 폐쇄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러시아 침공에 국제 유가 들썩
성급한 탈원전의 한계 드러나
새 정부, 현실 기반한 정책 필요

사실 고리 원전 1호기 폐쇄는 그로부터 2년 전인 2015년 6월에 결정됐다. 원전 폐쇄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결정이었지만 ‘탈원전 세리머니’는 후임자인 문 대통령의 몫이었다.

그런 문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에너지 공급망 관련 현안보고 회의에서 “원전이 지속 운영되는 향후 60여 년 동안은 원전을 주력 기저 전원으로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취임 후 단호한 어조로 탈원전을 외치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논란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북 울진에 들어선 신한울 원전 1·2호기의 모습. 인근의 신한울 3·4호기는 발전 사업 허가를 받은 상태에서 정부 방침에 따라 건설이 중단됐다. [연합뉴스]

경북 울진에 들어선 신한울 원전 1·2호기의 모습. 인근의 신한울 3·4호기는 발전 사업 허가를 받은 상태에서 정부 방침에 따라 건설이 중단됐다. [연합뉴스]

특히 원전이 순차적으로 폐기되는 마당에 ‘60년 동안 주력’이라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이를 야당과 언론의 이해 부족으로 치부했다.

그는 지난 2일 SNS에 “과도하게 이념화·정치화되면서 우리 에너지 정책의 미래를 합리적으로 논의하기 어렵게 된 상황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바탕에는 문재인 정부가 원전을 이념적 악(惡)으로 규정하고, 어느 날 갑자기 혹은 급격하게 폐기할 것이라는 정치 공세적 프레임이 자리 잡고 있다”고 비판했다.

주력 논란은 논외로 하더라도 에너지 문제가 과도하게 이념화·정치화됐다는 박 수석의 말엔 동의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만든 가장 큰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국정 최고 책임자인 문 대통령에게 있다.

고리 1호기 영구정지 기념사를 보면 탈원전의 기저에는 원전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깔렸다. 당시 문 대통령은 “설계 수명이 다한 원전 가동을 연장하는 것은 선박 운항 선령을 연장한 세월호와 같다”는 말까지 했다. 이런 표현이 에너지 정책을 이념화로 이끌었다고 본다.

월성 원전 1호기 폐쇄도 깊은 상처만 남겼다. 안전성 강화에 6000억원을 투입했음에도 월성 원전 1호기는 2019년 영구정지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 경제성을 의도적으로 저평가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담당 장관과 공무원 등이 기소됐다.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들은 감사원 감사를 앞두고 한밤중에 사무실로 들어가 자료를 삭제한 사실까지 드러났다. 월성 1호기는 설계 수명을 10년 연장하는 과정을 두고 재판 중이었다. 법원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면 어땠을까. 법원의 판결이 제때 나오지 않았더라도 월성 1호기는 올해 11월 자연스럽게 퇴장하는 운명을 맞았을 것이다. 설령 이번 대선에서 정권이 바뀌더라도 월성 1호기의 수명을 다시 연장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로 국제 유가가 치솟고 있다. 단순히 가격만 오르는 게 아니다. 에너지 수급 지형 자체가 변화할 모양새다. 독일 등 유럽은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를 줄이려 하고 있다. 에너지는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투자 격언처럼 한국도 특정 에너지원에 과도하게 의존하면 안 된다. 한국은 독일처럼 전력을 바로 수입할 이웃 나라도 없다. 문재인 정부 들어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설비가 대폭 확장됐지만 태양광은 낮에만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

곧 출범할 새 정부엔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이미 부지가 마련돼 있고 주기기 제작에 수천억원이 들어간 신한울 원전 3·4호기 건설 재개 여부와 2030년까지 설계 수명을 다하는 원전 처리 문제다.

새 정부가 현 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따를 필요도 없으며 무조건 정반대로 갈 이유도 없다. 박근혜 정부는 고리 1호기 폐쇄를 결정하면서 고리 1호기의 발전 용량이 상대적으로 적고, 고장이 잦다는 점을 내세웠다. 그 기준을 적용하면 적절한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

또 진보 진영에서 원전을 문제 삼듯이, 보수 진영에선 태양광 사업의 문제를 지적한다. 비리는 처벌해야 하지만, 특정 에너지원을 악마화할 필요는 없다. 현실을 직시하고 이념에서 벗어나야 제대로 된 에너지 정책을 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