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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포격, 우리 엄마 어떡해요" 한국 온 우크라 임신부 흐느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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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엔 계속 포격소리가 들리고…혹시 몰라 짐을 싸두긴 했다고….”
수화기 너머 임 이리나(30)의 목소리는 떨렸다. 1주일 전 남편과 함께 한국에 온 그는 우크라이나에 남아있는 가족 걱정에 밤잠을 설치고 있다고 했다. 언니와의 텔레그램 영상통화로 전해 듣는 고국 사정이 점점 나빠지고 있어서다. 지난 24일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수도 키예프 등엔 미사일과 포탄이 떨어지고 있다. 임 이리나는 “비행기를 타면서 제발 전쟁이 없길 기도했는데 결국 이렇게 돼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라며 흐느꼈다.

우크라이나에서 만난 국제 부부

지난달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임택민(왼쪽)씨와 임 이리나씨. 사진 임씨 제공

지난달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임택민(왼쪽)씨와 임 이리나씨. 사진 임씨 제공

임 이리나는 한국인 남편을 둔 우크라이나인이다. 수년 전 한국의 한 행사에서 택민씨와 만나 인연을 맺었다. 2020년 우크라이나에 유학 온 택민씨와 결혼하면서 ‘아르테모바’ 대신 남편의 성 ‘임’을 쓰게 됐다.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빠진 그는 의류 관련 일을 하면서 틈틈이 한국어를 익혔고 국내에서 온라인으로 열린 한국어 경진대회에 도전하기도 했다.

지난달 6일 임씨 부부는 한국에 왔다. 아이가 생기면서 인사차 남편의 고향인 부산을 찾은 것이다. 그때만 해도 고국에 전쟁이 일어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달 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 국무부는 벨라루스 주재 미국 대사관 직원들의 가족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한국에 머물던 임씨 부부가 지난 6일 한 달 만에 우크라이나로 돌아갔을 땐 수도 키예프에 이미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임씨 부부(가운데)는 지난달 6일 한국에 와서 가족들과 단체사진을 찍었다. 사진 임씨 제공

임씨 부부(가운데)는 지난달 6일 한국에 와서 가족들과 단체사진을 찍었다. 사진 임씨 제공

상황은 갈수록 급박해졌다. 지난 12일 한국 외교부는 우크라이나 전역에 여행 경보 최고등급인 4단계(여행금지)를 긴급발령했다. 현지 체류 중인 교민들에겐 조속히 대피하고 철수하란 공지가 내려왔다. 한국 국적인 택민씨는 고국으로 가야 했다. 임신 25주에 접어든 이리나는 고민에 빠졌다. 다른 가족을 두고 고국을 떠난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서다. 이리나의 어머니와 언니 가족은 우크라이나 미콜라이프에 있다. 대대로 가족이 나고 자란 고향이다. 고심 끝에 “곧 돌아올 수 있겠지”란 희망을 품고 폴란드를 거쳐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포격 소리에 피난 짐 꾸리는 우크라이나인 

하지만 지난 24일 결국 전쟁이 터졌다. 수도 키예프에서 500㎞ 떨어져 있지만 미콜라이프 시민들은 전쟁 여파를 느끼고 있다고 한다. 근 이틀간 새벽마다 포격 소리가 들리면서 사람들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상황이 급박해지면 언제든 피난을 떠나기 위해서다. 우크라이나 정부도 주요 서류와 식량 등 필수품을 챙겨두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라는 취지다. 임 이리나는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언니 가족은 직장에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는데 7살 딸에게는 차마 전쟁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달래고 있다더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잊지 말고 관심 가져달라”

지난 24일 오후 임 이리나가 우크라이나에 있는 언니와 영상통화를 하고 있다. 사진 임씨 제공

지난 24일 오후 임 이리나가 우크라이나에 있는 언니와 영상통화를 하고 있다. 사진 임씨 제공

고국의 혼란은 한국에 머무르는 임씨 부부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앞서 이라나는 단기일반비자(C-3-1)로 한국에 들어왔다. 서둘러 한국에 와야 했던 탓에 방문 비자를 골랐다. 유효기간이 3달인 단기일반비자는 오늘 5월 만료된다. 6월 초 출산을 앞둔 이리나가 한국에 더 머물기 위해선 결혼 비자(F6)로 바꿔야 했다.

결혼 비자를 받으려면 혼인신고서와 범죄사실 증명서를 아포스티유(국제 공증)를 거쳐 제출해야 한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현지의 관련 부서가 전시상황을 이유로 발급을 미루면서 문제가 생겼다. 부부는 자칫 이리나가 만삭의 몸으로 갈 곳을 잃게 될 상황에 놓이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임 이리나는 “하루라도 빨리 전쟁이 끝나고 비자 문제도 해결돼 우크라이나로 돌아가고 싶다”며 “국제사회가 우리를 잊지 않고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그게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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