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살 손자 앞 할머니 참변…사다리차 작업, 고깔만 세우고 끝 [이슈추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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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안전 요원을 항상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 현장 통제는 어려워요. 사다리차 근처 지나가지 말라고 아파트 경비원이 고깔 세워두는 정도죠.”
20년째 이삿짐운반용 리프트(사다리차) 전문업체를 운영하는 김모(54)씨의 말이다. 고층 아파트 이사 현장의 사다리가 사람이나 차량을 덮치는 사고는 그에게도 공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씨는 “안전을 위해 공간을 확보하려 해도 단지 내 주차 문제가 있어 쉽지 않다”며 “일을 일찍 끝내려면 현장 통제 없이 무리하게 작업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했다.

사다리차로 인한 인명·재산 피해가 연이어 발생하면서 이사 현장의 안전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1일 서울 노원구에서 사다리차의 사다리가 떨어져 행인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연합뉴스

21일 서울 노원구에서 사다리차의 사다리가 떨어져 행인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연합뉴스

사다리 꺾여 길 가던 할머니 참변

지난 21일 서울시 노원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5t급 60m 사다리차의 사다리가 꺾여 떨어지면서 60대 여성이 머리를 다쳐 숨졌다. 같이 있던 8살 손자는 얼굴을 다쳤고, 주변 차량 6대는 사다리에 깔려 파손됐다. 이삿짐을 다 옮긴 뒤 사다리를 접는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정확한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지난 3일엔 인천시의 아파트에서 24층에 짐을 올리던 사다리차가 쓰러지면서 맞은편 세대 창문을 깨는 일이 있었다. 지난달 강원도 춘천시에선 이삿짐을 옮기던 사다리차가 쓰러져 분리수거함과 주변 차량을 덮치기도 했다.

반복되는 사고, 구조적 문제 지적돼

유사 사고가 반복되자 업계에선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사업체는 사다리차를 보유하지 않고 중장비업체에서 전문 기사를 부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이사 작업자들은 사다리차에 대한 지식 없이 현장에 투입되는 게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서울의 한 이사업체 직원은 “우리는 사다리차 기사가 시키는 대로 하고 이삿짐만 실어 나른다. 차량 관리와 사고 예방은 사다리차 업체 소관이다”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이사업체가 직접 사다리차를 관리한다 해도 중장비업체보다 전문성이 떨어져 사고의 위험이 줄지 않는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 중장비업체 대표는 “이사업체 직원들이 사다리차 사용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받고 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 사다리차 전문 직원 없이 돌아가면서 차를 관리하는 것도 위험하다”고 했다.

지난 2017년 발생한 사다리차 전복 사고로 깔린 차량. 연합뉴스

지난 2017년 발생한 사다리차 전복 사고로 깔린 차량. 연합뉴스

당국이 현장에 안내하는 지침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비판도 나왔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은 지난 2017년 ‘이삿짐운반용 리프트 작업 안전 수칙’을 만들어 이사업체 등에 배포했다. 안전 수칙엔 사다리차 사용 시 주변 통행을 제한하는 등 장애물을 제거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에 대해 이사업체 대표 최모(45)씨는 “현장 통제가 수칙에 나온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아파트 이사에 쓰는 사다리차는 60m가 넘는데 그럼 단지에 사람이 아무도 못 지나다닌다”고 했다. 지침에 대한 지적이 나오자 공단 관계자는 “현장 통제는 권고 사항이지 강제가 아니다. 아파트 관리소나 업체에서 자율적으로 해야 할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산업재해 아니라 조사 안 한다”는 안전 당국

사다리차 사고는 ‘산업재해’로 분류돼 근로자가 사망하거나 크게 다친 경우가 아니면 당국이 조사하지 않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따르면 최근 7년간(2014~2020) 이삿짐운반용 리프트 관련 재해는 164건 발생했다. 그중 사망사고는 11건이었다. 이 통계엔 사다리차 사고로 인해 행인이 다치거나 숨진 경우는 제외돼 있다.

노원구에서 발생한 사고도 작업자가 아닌 주민이 사망한 일이어서 당국은 별도의 조사를 진행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고용노동부 서울북부지청 관계자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사망자가 주민이라 산업안전보건법 적용 대상이 아니다. 근로자 보호가 주 업무기 때문에 적용 범위 밖의 현장까지 조사하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강태선 세명대 보건안전공학과 교수는 “이런 재해에 대한 당국의 조사가 수행돼야 사고의 원인과 교훈을 도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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