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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 네 켤레 벗어둔 채, 코끼리는 어디로 갔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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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티와 안잔, 짚풀 신발과 사운드 설치, 2021. [사진 PKM갤러리]

티와 안잔, 짚풀 신발과 사운드 설치, 2021. [사진 PKM갤러리]

전시장에 커다란 짚신 네 켤레가 놓여있다. 어딘가를 향해 함께 걷다가 신발만 남겨두고 사라진 듯하다. 그들은 누구이며, 다 어디로 갔을까.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We Where’에서 홍영인(50) 작가가 선보인 설치 작품이다. 제목은 ‘티(Thi)와 안잔(Anjan)’. 티는 동물원에서 일생을 마친 할머니 코끼리, 안잔은 티의 손녀 코끼리다. 작가가 영국 체스터동물원에서 관찰했던 코끼리다. 신발은 짚풀공예 명인 이충경, 박연화 손을 빌려 제작했고, 아프리카 숲을 연상케 하는 다양한 소리는 일렉트로닉 뮤지션 마일즈 오토, 색소폰 연주자 앤드루 닐 헤이스와 협업해 만들었다.

홍영인은 이번 전시에서 코끼리 신발을 포함한 신작 8점 등 26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9’ 전에서 새를 소재로 인간과 동물의 위계에 대해 질문했던 그는 더욱 다채로운 소재와 기법으로 ‘공동체’라는 화두를 다룬다. 모든 생명체가 공존하는 수평적 공동체다. 드로잉과 바느질, 펠트 조각, 악보, 음악 퍼포먼스를 펼쳐 화두를 탐구한다. 자수 작업으로 완성한 작품 ‘두 세계 사이 한 개의 문’(2021년)도 그중 하나다.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라는 사당 그림에서 착안한 이 작품에서 고릴라와 원숭이는 사당 곳곳에 자유롭게 앉아 있다. 조상 대신 고릴라와 원숭이가 인간을 바라보는 형상이다.

홍영인의 설치작품 ‘고릴라도 꽃이 필요하다’와 ‘두 세계 사이 한 개의 문’, 2021. [사진 PKM갤러리]

홍영인의 설치작품 ‘고릴라도 꽃이 필요하다’와 ‘두 세계 사이 한 개의 문’, 2021. [사진 PKM갤러리]

작가가 1970~80년대 한국 섬유공장 여공들을 생각하며 만든 텍스타일 콜라주 작업도 흥미롭다. 작가는 여공들 인터뷰를 영어로 번역한 뒤 단어를 발췌했고, 이를 천 조각으로 만들어 다시 이어붙였다. 이름 대신 번호로 불렸던 여공의 삶과, 노조 활동에 참여하던 그들 이야기를 여기에 담았다. 작가가 자신만의 방법으로 시도한 ‘역사 새로 쓰기’다. 한국 민주화 운동 보도사진에서 추출한 실루엣으로 악보를 만든 ‘사진-악보’ 작업도 있다. 과거 사건 속 현장 이미지를 추상적인 선으로 뽑아내고, 이것을 악보로 만들어 연주한다는 발상 자체가 기발하다. 역사의 한 장면을 공감각적으로 전환한 것이다.

홍영인의 작품은 관람객에게 적극적인 참여와 상상력을 요구한다. 한 발짝 더 다가가면 작가가 펼쳐놓은 따뜻하고, 섬세하고, 풍부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현재 영국 바스대 교수인 홍영인은 서울대 미대(학·석사)를 거쳐 영국 골드스미스대에서 석·박사를 마쳤다. 2003년 석남미술상을 수상했고,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원 작가로 선정됐다. 전시는 2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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